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러관계 (문단 편집) === 후반 === [[파일:1024px-Chinese_Eastern_Railway-en.svg.png]] 1895년에 일본이 청나라와의 [[청일전쟁|전쟁]]으로 [[랴오둥]]을 차지했지만,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독일이 [[삼국간섭]]으로 일본에 압력을 주면서 [[다롄]]은 1895년에서 1901년까지 [[러시아령 다롄]]이 되었다. 당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던 러시아는 시베리아에서 하얼빈과 다롄을 잇는 철도 노선까지 부설하고 이를 계기로 하얼빈에는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외만주는 근대 후기부터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를 개척하면서 건설한 철도인 '철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지나는 곳 중의 하나이며, 소련 시기에는 많은 동유럽, 러시아 및 인근 지역의 유대인들이 이 길을 통해 극동 지역으로 이주되기도 했었다. 러시아는 [[하얼빈]]을 대놓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연해주로 지나가는 요충지로 만들고 러시아식 신도시를 건설했으며 [[다롄]]을 러시아 제국의 항구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1899년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러시아 제국은 의화단 운동에 개입했고 군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만주 전체'''를 점령하여 극동총독부를 세웠다.[* 청나라 입장에선 엄청난 치욕인데, [[만주족|민족]]의 발원지가 외국에게 점령된 꼴이 된 것이다. 한때 만주족 이외의 민족이 들어가지 못하게 봉금 지역으로 지정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싸고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을 치렀지만,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하얼빈과 다롄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의 청나라 만주 침투 시도는 좌절되었고 러시아는 중동로를 제외한 만주 전역에서 철수한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문화가 보편적으로 퍼져 차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나 거의 전량을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문제로 공급이 일정하지 못해 문제가 되었다.[* 육로 캐러밴으로 수입하는 차는 운송비가 비쌌고 해로로 수입되는 차는 운송비가 비교적 저렴하였으나 당시 흑해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알력이 지속되면서 공급이 일정하지 못하였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 출신 차 재배 기술자 유준주를 초빙하여 [[조지아]] 일대에 차 재배를 시도하였고, 러시아 제국 영내에서 차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 홍차는 조지아의 주요 특산품으로 소련 각지에 공급되는 주요 특산물이 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중화권-러시아-만주 관계, version=17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