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나라 (문단 편집) == 평가 == >만약 청 제국의 직성 지역에서만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청나라 황제는 한화에 성공한 '[[중국]]'의 수명천자(受命天子)처럼 보이지만 직성 이외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내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대칸의 이미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불법(佛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라는 이미지,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리장군(伊犁將軍, ili jiyanggiyūn)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자. 다만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는 호자들과 [[위구르|위구르인]]과 [[회족]]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 이미지를 각각 갖게 된다. 그리고 [[팔기군|기인]]의 세계에서는 [[누르하치]]의 계승자인 한(汗)으로 표상되었다. >----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중 지배층은 대부분 [[만주족]]이었지만 소속 민족이 다양했던 만큼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민족마다 청 군주의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만주에선 [[금나라]]를 계승한 한[* 칸의 만주어 발음이다.]으로, 북방의 [[몽골]] 지역에선 [[원나라]]를 계승한 칸으로, 중원에선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로, [[티베트]]에선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으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강]]과 [[닝샤 후이족 자치구|영하]]에선 이슬람의 수호자로[* 물론 청나라 황제는 [[티베트 불교]]를 더욱 선호했으며,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 서남 지역에서는 토사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졌다. 청나라의 황제는 이러한 위치를 이용해 국가를 통치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의 칸으로서 얻은 군사력을 중원의 엄청난 재력으로 유지, 통솔했다. 그러나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및 제조 금지[* 본격적인 중원 천자로서의 청나라 황제들 중 화기의 연구 및 제조에 있어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긴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 뿐이며, 이쪽도 치세 후기부터는 화기의 연구 및 제조를 금지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리고 강희, 옹정 연간의 문자의 옥은 [[건륭제]] 때마냥 막나가지는 않았다.] 등으로 비판을 받는 편이다. 특히 청이 유럽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청의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잘 봐줘도 명나라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가경 4년에 명나라 화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해전에서도 명나라는 청나라만큼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예가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iaoluo_Bay|랴오뤄 만 해전/요라만 해전(料羅灣海戰)]]. 명나라가 다른 문명권과 다르게 유럽 세력과의 해전에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르네상스가 진행되면서 다른 문명들을 압도적인 속도로 능가하기 시작하고 있던 유럽 문물을 따라가고 있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나라 지배층들이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전 6권이 간행되어 중국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게 명나라 때의 일이고 군사학, 농업, 천문학 등에서의 서적이나 훈련 방법 등에서 유럽 문물이 의외로 이미 인정을 받고 있었다. 망조가 들어서 어이없게 날아가기는 했지만 명나라는 유럽식 훈련으로 수학과 과학이 동원된 사격술 등을 익힌 군대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정예병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다만 명나라와 싸웠던 당시 네덜란드는 전근대 시절이었고, 독립을 위해 온 힘을 유럽에 쏟던 30년 전쟁 와중이었다는 점에서 청이 만난 영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영국은 당대 최강대국 중 하나인데다 산업 혁명을 일으킨 근대 국가인지라 청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당시 네덜란드도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로 나아가던 국가라 해전에서 비유럽은 물론 유럽까지 아주 탈탈 털고 다녔으나, 세계 제국인 대영제국과 결국 중소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네덜란드는 체급 자체가 다르다. 특히 [[건륭제]]는 평생에 걸쳐 전제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위해 반청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별별 시덥잖은 이유로 트집잡아 목숨을 앗아갔다. 이에 중국 학계는 스스로의 자생능력을 잃은 채 오래되고 오래된 고문을 다루는 고증학에만 치중하며 망해가고 있었다. 말기에도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 황족들은 대부분 황제국의 최상위 지배 계급으로서 누리는 권력에 탐닉할 뿐 근본적인 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게, 청나라의 지배는 독자적으로 창시한 제도도 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유교를 필두로 하는 한족들의 사상과 문화가 기반이었고, 인문학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자연과학은 원래 관심 밖이었다. 명나라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명나라 시절부터 이미 기술력이 뒤쳐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며, 청나라 역시 [[현시창]]을 느낀 뒤에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건 명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애초에 여진족은 유목민족이 아니라 농경, 어업, 수렵, 채집 등 다양한 경제 활동을 해왔고, 청나라도 유목 제국이 아니라 엄연한 농업국이었다. 중국에서 [[한족]] 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를 매우 싫어하며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을 지배한 나라 중에 청 외에도 [[원나라|몽골족이 세운 제국]]도 매우 싫어하여 "애산지후무중국(崖山之後無中國, [[애산 전투]](원vs송) 이후 중국은 없다.)"이라고 말할 정도. [[치파오|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변발|헤어 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라고 생각하며, 19세기 중국이 근대화에 진입을 못 하고 열강의 각축에 밀린 것도 [[만주족]]의 통치 때문이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편 이런 한족 우월주의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만주족은 중국의 산타클로스란 말도 있다. 사실 명조까지 중국의 강역이 아니었던 만주,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등은 전부 만주족이 정복하여 중국에 붙인 지역이기 때문. 만주족 왕조가 한족 왕조보다 유능했다고 돌려까는 내용이다. 맞기만 한 말은 아니지만 틀리기만 한 말도 아닌 게, 청나라는 명나라 등 한족 왕조들에 비해 영토가 매우 넓고 민족도 더욱 다양한 데다 지배민족이 다수의 한족이 아니라 소수의 만주족인 상황에서 한족 왕조와 같은 중앙집권제를 추구했기 때문에 통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만주족]]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비단 한족들뿐만 아니라 동시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외몽골]]의 [[몽골인|몽골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경향[* 사실 [[몽골인]]들도 청나라가 들어서기 전에는 [[여진족]]들을 하찮은 족속들이라고 무시하던 역사가 있었다. 특히 이 경향은 외몽골의 할하 부족이나 [[오이라트]]가 심했다. [[북원]]은 여진족이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어서 딱히 신경쓰진 않았다.]이 있는데, 외몽골 입장에선 [[청나라]]의 지배로 인해 같은 [[알타이]]계에 뿌리를 둔 [[내몽골]]과 [[탄누투바]], [[위구르]]를 잃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몽골족의 일파인 [[준가르]]부의 씨를 말리기도 했다. 물론 오이라트 계열도 몽골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현 외몽골에서 할하 인과 함께 두번째로 많은 부류가 이 오이라트인들이다.] 물론 [[투바]]와 [[위구르]]는 [[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고 위구르는 10세기부터 이슬람화되어 [[몽골인]]들과는 문화적 이질감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언어도 같고 원래부터 함께 살아온 [[내몽골]]이 분리된 건 외몽골 할하인들 입장에서 정말 뼈아프다. 이때문에 유튜브 같은 데서 보면 만주족은 중국인과 몽골인들 사이에서 자주 다굴당하는 편인데, 처음엔 원나라vs송나라 떡밥 논쟁에서 시작했다가 갑자기 청나라가 끼면 합심해서 청나라를 까는 재밌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물론 몽골 제국의 중국 정복에 대해서는 반대로 한족 우월주의자들과 만주족이 합심해서 몽골 제국을 까기도 한다. 전자는 [[남송]]의 멸망과 관련해서, 후자는 [[금나라]]의 멸망과 관련해서 몽골 제국을 깐다.] 중국인은 만주족이나 몽골족이나 다 같은 주변 오랑캐로 치부해버리고 몽골인은 만주족들이 중국 좋은 일만 시켜놓았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중국 영토는 청나라 때 확정된 것이고 적어도 외몽골인 입장에선 같은 알타이계인 [[내몽골]]이나 [[튀르크]] 등을 잃었으니 화날 만 하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로,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가 후금 칸인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대원진국옥새를 바치면서 항복을 선언하자 천명이 대원에서 대청으로 계승되었다며 에제이를 배신하고 후금에 합류했다. 그리고 후금은 스스로를 중국 황제국으로 선포해 국호를 청으로 바꾼다. 특히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후금 때부터 만주에 합류한 데다 청나라 치하에서 우대를 받기까지 해서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강한 할하인과 달리 만주족을 되려 친척 민족이라고 생각하며 청나라는 한족 왕조가 아니며 한족은 만주-몽골의 신민이었음을 강조한다. 실제로도 청나라는 사실상 만몽 연합정권이라 보는 분석이 자주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현재 중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한족]] 왕조인 [[송나라]]나 [[명나라]] 뿐만이 아닌 몽골족 원나라, 만주족 청나라 등 이민족에서 비롯된 것도 많다. 우선 [[변발]]이라는 특유의 머리 스타일부터 해서, 우리가 흔히 UFO 모자로 아는 모자는 사실 [[몽골인]]들의 전통의상 델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치파오 역시 만주족 복식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춘절 때 거는 재복을 비는 민화 역시 관우와 함께 나오는 동자의 헤어 스타일이 몽골족 변발이다. 사실 [[칭기즈 칸]]의 임팩트와 서구와 접촉한 마지막 중국왕조가 청인 연유 등으로 외국에 이들 유목민족의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 버린고로 이민족의 왕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러시아어 등에서 중국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이 [[거란]]이 기원인 키타이일 정도.[* [[홍콩]]의 [[캐세이퍼시픽항공]]의 캐세이는 거란이고 퍼시픽은 잘 알다시피 [[태평양]]으로, 굳이 뜻을 해석하면 '''중화태평양항공''' 내진 '''중국태평양항공'''이라는 뜻이다. 남방의 홍콩에 소재한 회사에 거란 이름이 붙은 건 중국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키타이가 거란에서 유래해서이다. 이 표현은 미국은 원래 아메리카라 일컫지만 시적으로 일컬을 땐 컬럼비아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 [[Warhammer(구판)]]에 등장하는 세력 [[캐세이]] 역시 중국을 모티브로 했지만 이름은 거란족에서 유래하였다. ] 반면 서양에서는 신청사라는 사조를 이룰 정도로 청나라의 '''만주족 중심 세계제국'''으로서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쪽이 국제 중국사학계 주류 시각이다. 영미권, 구미 출신 중국사학자가 쓴 청사 대중서가 시중에 많이 소개될 정도인데, 비슷한 시기를 다룬 중국 학자들의 서적과 함께 읽다보면 미묘하게 다른 태도를 많이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국내 중국사학계와 중앙아시아사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국어였던 만주어 문헌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만주어의 학술적 위상이 서양사에서 라틴어가 차지하는 위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매우 높아졌고, 급기야는 한국의 여러 대학들이 역사 전공자들을 위해 만주어 강좌를 열고 만한사전을 내거나 한국의 여러 대중매체에서 만주어 고증을 시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중국의 어용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이 보이는 반응도 몹시 흥미로운데, 청나라를 중화민족이 이룩한 중화제국이 아닌 만주족의 세계제국으로 평가하는 신청사를 [[하나의 중국]]을 깨부수려는 서양 반중주의자들의 분탕질이라며 분개한다거나, 조선 배경의 한국 사극에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강조하며 청나라에게 무릎 꿇는 것을 치욕스러워하는 현상에 혼란스러워하거나, 그러면서도 청나라가 중국의 판도로 확보한 신강, 영하, 청해, 티베트, 내몽골, 만주 등의 지역은 원래부터 중화민족의 무대였다며 역사왜곡을 시도하는 등의 다채로운 반응을 엿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들은 만주족의 중원 정복으로 세워진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를 마냥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편이지만 사실 중국 입장에서 청나라는 매우 고마운 나라인데, 그 이유는 현재의 만주, 내몽고, 신장, 티베트 등 중화 문명과 별개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지역들이 청나라 때 중국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최대 강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보다 훨씬 넓었다. 현재의 중국이 가지지 못한 대만, 몽골, 연해주 및 서부 영토 일부를 더 가지고 있었다.] 현 중화인민공화국이 전통적인 중국 영역보다 2배 이상 넓은 강역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청나라 시기 영토 확장의 성과 덕분으로, 만약 청나라가 없었다면 만주, 신장, 티베트 등 현재 중국이 지키려고 하는 소수민족 지역들은 모두 독립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명청전쟁의 진정한 승전국은 청나라가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한국에서는 한때 [[환빠]]들의 맹목적 찬양에 따른 영향으로 같은 침략자였던 일본 도요토미 정권 및 [[일본 제국]]과 달리 '''조선의 주권을 보존해준 관대한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강해져서 그야말로 찬양 수준의 호평을 받았으나, 최근에는 환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평가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