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나라 (문단 편집) == [[/문화|문화]]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청나라/문화)] 청 시기의 문화는 가히 중국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기들 중 하나였다. 특히 청나라 조정은 [[3S 정책|한족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목적으로 문화를 진흥시켰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 시기의 《[[강희자전]]》, 옹정제 시기의 《고금도서집성》, 건륭제 시기의 《[[사고전서]]》 등이다. 이 시대의 문학 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대륙에서는 《[[삼국지연의|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홍루몽》 외에도 《[[요재지이]]》, 《[[유림외사]]》도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청나라 문학 작품이다. 특히 《요재지이》는 중국의 판타지 소설 모음집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귀신들이 인간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그 특징이며 믿거나말거나 식의 구전 이야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간]]을 하다가 찢겨 죽은 여자와 개 이야기다. 《요재지이》에 따르면 이 여자가 관청으로 압송되어가던 중에, 민중들이 이 여자가 수간을 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자 간수가 돈을 받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간을 시켰다고 한다.]들이 많이 실려 있다. 당대 청나라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허나 이 자유로운 분위기는 오직 순수 문학이나 소설에 한정되어서, 만주족의 권위를 침범하거나 청나라에 반대되는 내용들은 얄짤없이 검열받았다. 건륭제 시기에 특히 [[문자의 옥]]이 많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중국 문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기도 했다.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과 [[열하]]의 [[피서산장]]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한족의 양식이 많은 것에 반해, 청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기본적으로 한족의 건축방식을 답습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동군연합]]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나 티베트 등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다. 또한 화려함과 정교함을 숭상하여 이전보다도 거대한 크기의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고, 색유리를 사용하여 건물을 꾸미는 것이 유행했다. 타 민족들의 문화에 대하여 야만적이라고 배척했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 비하여, 스스로가 이민족이었던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타 문화에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앞서 말한 열하의 피서산장이다. 피서산장에 있는 보타종승사원(普陀宗乘之庙)은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본따 지었는데, 타민족의 문화를 천시하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사례였다. 청나라 때도 사회적으로는 일단 기본적으로 [[유교]]식 이념들을 깔고 들어갔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중화의 합법한 계승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유교를 더더욱 강조했고, 어떤 면에서는 명나라보다도 엄격한 경우가 잦았다. 당연히 부계중심적인 사회였고,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남성과 함부로 이혼할 수 없었으며[* 정말 심각한 상해를 입히거나 여성의 가문이 매우 지위가 높으면 예외다.] 사회적으로 그 제약도 상당히 심했다.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재산을 소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 제사를 지내거나 재산을 상속받는 문제들에도 남자에 비해 훨씬 하등한 대접을 받았다. 나중에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러한 남녀불평등을 타파한다고 했으나, 이 오랜 폐해는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되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홍등가]], [[동성애]], 매춘 등 성 관련 풍습들은 청나라 초기에 들어서 크게 탄압받았다. 강희제나 옹정제 등은 황제가 주도해서 이들을 때려잡았고, 이때문에 중국의 매춘 산업은 청나라 초기에 쇠퇴하였다. 허나 인간의 욕망을 억누를 수는 없었던지, 건륭제 시기 말에 이르자 탄압이 줄어들면서 홍등가가 다시 대대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톈진, 충칭, 항커우 등의 대도시들에는 거대한 규모의 매춘굴들이 자리잡았으며 고위 관료들부터 평민들까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상하이]]는 19세기 들어 서양 교류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매춘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18세기 들어서는 젊은 과부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당시 청나라 사회에서는 어린 여성들이 나이 많은 고위급 남성들에게 시집을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는데, 이 남편들이 결혼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버림에 따라 이 어린 신부들이 과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여성들은 가문 내에서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가 없었는데, 만일 남편이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평생 아이를 낳아 기를 희망도 없이 홀과부로 늙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대를 이을 아이를 낳은 몸도 아니니 가문 내에서 잘해줄 리도 없었다. 청나라 조정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지해서 함부로 어린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는 집들에게 상을 내리며 이 풍습을 없애보려 노력하였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나이 많은 남편이 죽으면 함께 죽어 정조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열녀다'라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청나라 사회는 갈수록 타락의 길로 빠져들어갔다. 다만 이 내용들을 보고 청나라 시대에 여성 인권이 바닥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에도 문제가 있다. 청나라 시기에는 무역과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가문의 남성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이때 남자들이 사업 등의 이유로 집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집에 남아있던 아내가 집안의 경제권을 쥐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여성들은 남아도는 시간과 돈으로 사회적 활동에 참가하거나 사찰의 법회 등에 참석하고는 했다. 경우에 따라 달랐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한편 청대에는 수많은 한족여성들이 만주족 남성들의 첩이나 노리개가 되었다. 태평천국 격문에도 언급될 정도이다.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 및 수명성(隨名姓)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만주족의 성씨]]를 참고하자. 한국에서 "너 왜 그런 (노출심한)옷을 입고다니냐?"같은 유교적인 말에 "지금이 조선시대야?"라는 표현을 쓰듯 현대 중국에선 "지금이 청나라야?"라는 표현이 종종 쓰인다. 한국의 조선처럼 가장 가까운 전통적인 전근대 시대이기 때문이다. 청 대의 의복은 만주족의 전통의상인 챵꽈(남성)와 [[치파오]](여성)이다. 물론 한족의 전통 의상인 [[한푸]]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기는 하였으나, 청 황실이 만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만한차별을 엄격히 하면서 아무래도 한족의 영향보다는 만주족의 의복과 더 닮아있다. 만주족의 기본 의상인 치파오는 기본적으로 원피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허리 아래쪽에 옆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족의 한푸는 기본적으로 하늘하늘하고 소매가 넓으며 품이 커서 여유가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치파오는 상대적으로 더 몸에 딱 붙어 굴곡을 강조하고 몸매를 더 잘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특히 현대의 치파오는 1910~20년대 서양식 의복의 전래에 따라 근대적으로 개량된 것으로, 청나라 말기에 가서야 등장한 것이기에 청나라 대의 보편적인 의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청나라는 입관 이후 한족 이후 원나라의 선례를 밟지 않기 위하여 피지배계급이었던 한족의 의복 문화를 근절하고 만주족의 전통 복식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중화 사상을 중심으로 하던 한족에게는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청나라 조정도 할 수 없이 타협,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 원칙을 내세워 남성의 경우에는 무조건적으로 만주족의 복식을 답습하되, 여성과 도사, 승려 등의 경우에는 일부 한족의 복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청나라가 오래 이어지며 만주족의 통치가 당연시되기 시작하자, 점차 여성의 복식 역시 만주족의 복식을 자연스레 닮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청 말에는 명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였다. 청나라 일반 남성의 경우, 장삼이나 장포(長袍)를 기본적으로 걸친 후, 그 위에 조끼 형태의 [[마과]]나 마갑 등을 덧대어 입는 경우가 흔했다. 참고로 장삼은 긴 원피스 형태의 남성용 치파오라고 할 수 있는 옷으로, 옆트임이 존재한다. 또한 마과나 마갑의 경우, 본디 만주족들이 말을 탈 때 보온용으로 위에 걸치던 조끼 형태의 단상의였는데, 청 초기에는 만주족의 특권으로 여겨져 함부로 입을 수 없었으나 옹정제 연간에 한족 일반 백성들도 입는 것이 허가되었다.[* 한편 중국 청나라 대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것이 이 마과인데, 이 마과도 아무나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황제의 색이던 황색마과의 경우,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가 친히 하사한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던 것으로, 일반인이 입었을 경우 곧바로 끌려가 경을 쳤다.] 한편 청나라 여성이 입었던 것이 그 유명한 [[치파오]]인데, 양옆에만 트임을 주며 허리를 매지 않는 형태였다. 소매끝과 옷깃, 밑단 등에 다양한 색의 천을 달아 포인트를 주었으며, 특히 목선의 경우 둥근 형태가 기본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깃이 올라가는 형태를 띠며 점점 화려해졌다. 또한 그 위에 비갑이나 피풍이라고 하여 소매가 없는 조끼 비슷한 방한용 겉옷을 두르기도 하였으며, 보통 신분이 높을수록 이 비갑과 피풍의 무늬가 화려한 경향이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hinesepeople1860s.jpg|width=100%]]}}} || || {{{#000000 1860년대 청나라 [[광둥성]]의 현령(縣令) 부부를 찍은 사진 }}} ||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청나라 시대 여성들의 독특한 머리 모양은 '양파두'라고 부른다. 정수리에서 머리를 길게 두 갈래로 가른 다음, 편방이라는 비녀에 감아 만든 것이다.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시간과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머리 모양이라서 평민들보다는 귀족층이나 돈많은 세가들의 여인들이 주로 하던 머리 스타일이었다. 한편 남성의 경우, 남성이 쓰고 있는 모자는 '양모'라고 부르며, 말꼬리털 등을 붉은색으로 염색한 실을 등나무처럼 가벼운 재질로 만든 원뿔 모양의 모자에 늘어뜨린 것이다. 입고있는 의복은 '조복'이라고 부르며, 현대에서의 군대 예복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종묘제례, 즉위식, 조회 등 중대사에서만 간간히 입고 나오는 의식용 복장이었다. 또한 남성이 어깨에 두르고 있는 저 독특한 모양의 장식도 청나라 시대 인물들이 굉장히 많이 입고 다니던 것인데, 이를 '피령'이라고 부르며, 길복이나 조복 등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걸치고 다니는 일종의 예식용 칼라 정도로 보면 된다. [* 청나라 황제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저 피령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성이 매고 있는 목걸이의 경우, '조주'라고 따로 구분해서 부르며 108개의 구슬로 이루어져 있다. 구슬들 사이사이에 '불두'라고 하여 좀더 크고 재질이 다른 구슬들을 정확히 4개를 끼우며, 이는 1년의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조주의 뒤에는 탑모양의 장식과 구슬들을 꿰어만든 기다란 끈을 늘어뜨렸는데, 이를 '배추'라고 불렀다. 신분과 관직에 따라 조주의 품질 역시 달라졌으며, 만인지상의 황제의 경우에는 상아로 만든 조주에 황금을 장식하여 사용했다고도 한다. 또한 현대까지도 중국의 오랜 악습으로 남아있는 [[전족]]의 경우, 만주족의 전통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한족의 전통양식이다. 강희제는 오히려 이 전족이 여성의 노동력을 하락시켜 국가에 손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전족을 금할 정도였으나,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만주족 가문들이 이 풍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근대 시기까지 전해져 왔던 것이다. 흔히 '중국 모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사발 모양의 모자는 청나라의 관모(官帽)인데, 명나라의 [[사모]], 복두 등과는 그 형태가 확연히 달라 '청대관모(清代官帽)라고 따로 부른다. 겨울에는 벨벳으로 안을 덧댔고, 여름에는 등나무나 비슷한 가벼운 재질로 삿갓형 관모를 만들어 사용했다. 모자 위에 있는 단추나 꼭지 부분은 공식적인 석상이거나 예식 상에서만 달았고, 사적인 자리거나 일상에서는 떼고 모자만 썼다. 특히 고위 관료들은 모자 위에 공작새 깃털이나 붉은 술 장식도 달았는데, 이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대단한 명예였다. 공작새 깃털은 1-3개까지 달 수 있었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공작 깃털을 달 수 있었다. 모자의 꼭지 부분의 색깔과 장식은 계급에 따라 달라졌다. 고위급 관료들은 흔히 [[진주]]를 즐겨썼고, 1품 관리들은 [[루비]] 등 붉은색 투명 홍옥을, 2품은 [[산호]] 등 불투명한 붉은 홍옥을, 3품은 [[사파이어]] 등 투명한 푸른 옥을, 4품은 불투명한 푸른 옥을, 5품은 [[수정]] 같은 투명한 백색 보석을, 6품은 [[진주]] 등의 보석을, 7품부터 9품까지는 종종 [[황금]]이나 자줏빛 보석을 즐겨 사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