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학사/서양 (문단 편집) == 중세 철학 == [include(틀:서양 철학사/중세 철학)]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나아가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국교로 선포되면서부터 그리스 철학의 유산은 기독교 안으로 실질적으로 포섭된다. 물론 상기한 바처럼 기독교는 극초창기부터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였지만[*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유대교]]의 경우도 필론이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런 제도적 변화로 인하여 철학의 주된 임무는 곧 기독교의 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중세 철학의 특징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어록으로 알려진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다만 많은 철학사가들은 '철학이 시녀'라는 말이 곧 '[[중세]]는 그래서 [[암흑시대]]다!'라는 결론을 입증한다는 추론에 반대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문서 참조.] 흔히 '[[교부]]'라 일컬어지는 철학자이자 신학자들이 이끌어간 초기 기독교 철학은 상기한 바처럼 기독교의 정체성 및 [[야훼|하느님]]에 대한 철학적 설명, 그리고 [[영지주의]] 같은 이단이나 이교와의 논쟁 등에 많은 힘을 기울인다. 서기 2세기 교부인 [[오리게네스]]가 본래 그리스에서 호메로스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 쓰던 '알레고리아' 개념을 성경 해석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이런 흐름은 계속 이어져 갔으며, 대표적으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립된 [[삼위일체론]]이 그리스 가면극에서 쓰던 용어인 [[페르소나]](위격) 개념을 차용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런 교부들 가운데서도 [[신플라톤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은[* 다만 [[신플라톤주의]]는 [[영지주의]]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기에 여러 교부들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차용 과정에서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 [[형이상학]], [[심리철학]], [[윤리학]] 등 이후 서양 철학의 흐름에 큰 궤적을 남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 등에서 기독교를 플라톤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의 '[[사랑]]'과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이 중 자유의지는 기독교 내 철학에서 뿐만 아니라 이후 근대 철학의 영역에서도 뚜렷히 계승되어 현대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반달족]]의 침략 가운데 선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이 잘 대변하듯, [[서로마 제국]]이 이민족에 의해 멸망함에 따라[* 과거에는 이러한 현상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비판 받았으나 현대 사학계는 동의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계승된 지적 유산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막장 시대에서도 빛나는 유산들이 나왔는데, 오히려 시대가 막장이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사상들도 있었다. 일례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경우, 오늘날로 치자면 미국이 멸망하고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외계인에게 점령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시대를 살았기에, '영원할 것 같은 도시인 로마도 멸망했는데, 과연 인간의 문명은 영원할 수 있는가?', '어째서 인간의 문명은 멸망할 수 밖에 없는가?', '인간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그것은 죄 때문인가?', '그 죄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같은 사유들이 나오게 되었다. 마치 중국이 [[춘추전국시대]]라는 개막장을 보면서 멘붕을 겪으며 [[제자백가]]가 출현한 것 처럼, 서유럽은 문명의 붕괴라는 개막장을 맛보았기에 이러한 사유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동로마 제국]]의 경우 굉장히 안정적인 질서가 자리잡았기에, 제국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고 교회에서 이단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존재론 등이 발전하게 된다. 한편 흔히 [[암흑시대]]로 알려진 초기 중세에[* 중세에 대한 연구의 발전으로, 이제는 '중세는 늘 로마 시대보다 퇴보한 상태였다가 [[르네상스]] 이후로 다시 정신을 차렸다'는 식의 폄하는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서로마 제국]]의 붕괴 당시에 엄청난 사회적 혼란에 한정한다면, 적어도 그 시기만큼은 암흑시대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서유럽]]의 기독교 철학자들 및 [[성직자]], [[수도자]]들은 사회의 유일한 지식인으로서 얼마 남지 않은 옛 지적 유산을 보존하였다. 로마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고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던 도중, 동로마 제국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섬기던 [[고트족]] 궁정에서 처형당한 기독교인 철학자 [[보에티우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유럽이 전화에 휩싸여 있을 동안 [[아일랜드]]의 [[수도자]]들이 많은 고대의 문헌들을 보존해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일화 중 하나다. 이런 혼란은 [[카롤루스 대제]] 때 문예 부흥이 일어나고 [[교회]]의 힘이 세지면서부터 비로소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고전 그리스 학문은 '''[[이슬람 황금기]]''' 가운데 중흥을 맞이했다.[* 물론 서유럽 사람들이 멍청해서 그리스 문화를 유실한 것은 아니고, 언어의 문제 때문이다. 서방의 라틴어 문화권에서 고전 그리스 학문을 공부하려면 번역을 거쳐야 했기 때문. 오히려 이슬람 문화권의 경우, 해당 지역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살았기에 이런 방면에서 제약이 적었다. 반면 서유럽은 라틴어 문헌의 보존에서 강점을 보였는데, 일례로 키케로의 국가론(De republica)은 현대에는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용한 부분들 덕에 그 원본을 추정하는 데 도움을 받고 있다.] [[이슬람 제국]]에서는 '[[알고리즘]]'으로 알려진 [[알 콰리즈미]], [[알 파라비]] 등을 비롯해 뭇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출현했다. 논리학, 형이상학 등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이븐 시나]]는 이후 유럽 철학에 큰 유산을 남겼다. 비록 이븐 시나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은 이슬람의 가르침과 부딪히는 점 등으로 인하여 [[알가잘리]] 등 여러 이슬람 철학/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이후에도 이어져 '(아리스텔레스의 유일무이한) 주석가'로 불리기도 하는 [[이븐 루시드]] 같은 철학자[* [[영어]] 식으로 'The Commentator'. 같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일무이한) 철학자', 즉 'The Philosopher'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를 통해 [[알안달루스]]를 거쳐 결국엔 서유럽에도 도달하게 된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서유럽에서도 본격적으로 [[수도원]] 학교 및 [[3학4과]] 등으로 대표되는 초기 [[대학교]]가 서유럽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찍이 [[보에티우스]]가 생전에 [[라틴어]]로 번역하였던 저작들의 대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포르피리오스]]의 [[논리학]] 저작들이었기에, 당시 대학에서 주로 연구되던 철학 분야는 [[논리학]]이었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신 존재 증명]]으로 알려진 [[안셀무스]], 그리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로맨스로 유명한 [[피에르 아벨라르]] 등이 이 시기의 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이름을 남겼다. 이후 [[형이상학]]의 주된 문제 중 하나가 된 [[보편 논쟁]]도 이 시기에 촉발되었다. 안셀무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의 유(genus)와 종(species)[* 현대 논리학 및 형이상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술어'로 갈음된다.]에 해당하는 [[보편자]]가 존재한다고 본 '[[실재론#보편자 실재론]]'을 취했다고 짐작되는 반면, (콩피에뉴의 로스켈리누스를 사사한) 아벨라르두스는 그런 보편자란 이름 혹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없다고 주장한 '[[유명론]]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전문적인 학자들 간의 논쟁은 곧 본격적인 [[스콜라 철학]]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13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번역 되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당대 [[서유럽]]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진다. [[논리학]]으로만 알려졌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가운데 많은 부분, 특히 [[자연철학]]이 기독교 교리와 상당히 이질적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보나벤투라]] 등에 의하여 파리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이 여러 차례 [[금서]] 처분을 받는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로저 베이컨]],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작업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보편 논쟁의 맥락에서 토마스주의는 '중도적 실재론'으로 분류된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초월적인 보편자는 없지만, 그 대신 각 사물의 본질 속에서 객관적으로 보편적인 바(universale in re)를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운데 상당 부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비로소 [[보편교회]]의 교리와 조화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다. 이후 아퀴나스 식의 실재론과는 차이가 있는 [[둔스 스코투스]]의 실재론 및 [[오컴의 윌리엄]]의 유명론 또한 뚜렷하게 제기되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이후에도 [[가톨릭]]의 가장 유력한 철학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렇듯 알베르투스 등 후기 스콜라 철학자들의 성과는 [[철학]]과 [[신학]]을 분리시키고, 곧 [[자연철학]] 즉 후대 [[자연과학]]의 원형이 되는 학문의 출현에 기여하였다.[* 자연과학에 대한 이 공로 덕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오늘날 [[가톨릭]]에서 과학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는다.] 그리고 이런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스콜라 철학]]의 구도 가운데 철학은 신학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신학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