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학사/서양 (문단 편집) == 고대 철학 == [include(틀:서양 철학사/고대 철학)] 흔히 [[고대 그리스]] 철학의 발생은 '[[미토스]](Mythos)에서 [[로고스]](Logos)로의 이행', 즉 더 이상 신화가 아니라 이성에 기대어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 시도의 탄생이라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왜 [[파도]]가 치는 걸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델피 무녀한테 들었는데 [[포세이돈]] 님이 화가 나셨대.'가 아니라, 나름의 합리적이며 보편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자연적인 것과 인간이 만든 것 사이에 구분이 생겨났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의 질서(physis)와 인간의 규범(nomos)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유를 처음 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에게 해]] 그리스 식민지 [[폴리스]]인 [[밀레투스]]에 살던 [[밀레투스학파]]의 철학자들이다. 그 최초의 인물인 [[탈레스]]는 '모든 것의 [[아르케|근본(Arche)]]은 물이다'는 설명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게 [[포세이돈]]을 들먹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철학사가들은 [[의인화]]된 신인 [[포세이돈]]을 들먹이는 것과 달리 탈레스는 어떤 하나의 항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근본을 세계의 원리로 제시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즉 우리가 관찰하는 자연현상을 더 이상 '[[신]]의 변덕' 탓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탈레스에게 붙였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 즉 규정성(peras)을 갖는 구체적 개별자에서 찾았다면,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을 규정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무규정자(apeiron)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수한 무규정자에서 만물의 근원을 찾는 것은 공허한 것으로, 구체적인 개별자에 관한 문제와 종합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이루어낸 것이 이후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엘레아학파|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와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근본에 대해 각각 제시했다고 알려진 답은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지만, 둘 모두 이후 서양 철학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의 근본이 '존재'이며, 곧 만물이 다양한 것으로 이루어지며 또한 변화한다는 것은 그저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와 상반되게 '같은 강에 두번 들어갈 수는 없다'는 말로 유명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만물유전(萬物流轉))고 주장하였다. 두 입장 모두 언뜻 보기엔 매우 기이해보이지만, 많은 철학사가는 이 두 상반된 사유가 이후 서양 철학 전체를 가로지르는 큰 두 흐름이 된다고 본다. 한편 본토 그리스의 유망한 폴리스였던 [[고대 아테네|아테네]]에서는 [[민주정]]이 발달하여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고 싶으면 말솜씨가 뛰어나야만 했다. 이런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변론술과 [[수사학]] 등을 돈을 받고 가르치는 '지혜로운 자들' 즉 [[소피스트]]들이 등장했다. 오직 '실리'에만 매달릴 뿐인 소피스트들의 행태는 당시 아테네에서 종종 경원시되었지만, 현대의 철학사가들은 소피스트들 덕분에 철학의 관심이 자연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으로 넓혀졌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이런 소피스트들의 행태에 반기를 들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지혜로운 자(소피스트)'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ia) 자'라고 자처했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고라]]와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고, 생전 단 하나의 저작도 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철학'이 무엇인지, '철학자'는 어떠한 사람인지에 관한 표본이 되었다. 이를테면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같은 격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30인 참주정 시기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아테네의 부조리한 면모를 꼬집는 '아테네의 [[등에]]'로 활동했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사형 선고를 받고 독약을 마셨지만, 그의 유산은 그의 위대한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상대가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하는 '[[변증법]]'을 처음으로 고안했으며, 또한 서양 철학의 근본적인 화두이면서도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을 제시했다.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경우가 없으며, 책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언제나 미궁(aporia)의 상태에 빠지면서 끝난다. 이 미궁은 인간이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그 해답은 주어질 수 없는 난제들로, 현대 철학에서까지 이른바 '실존의 부조리'로 언급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직계 제자 중 하나인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을 비롯한 이전 철학자들을 계승하여 앎, 우주, 그리고 인간 등에 관하여 방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겼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라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어록에서 나타나듯 이런 방대한 사유는 플라톤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이후 서양 철학 전반의 기틀이 되었다. 귀족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엔 정치에 투신하기도 했던 플라톤은 교육기관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하면서부터 많은 '대화편'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풀어냈으며, 스승 소크라테스가 종종 등장하기도 하는 그런 플라톤의 대화편은 철학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이른바 '[[이데아]]론'은 플라톤의 중기 철학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이데아론은 참된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으로, 플라톤은 극단적인 실재론자로서 사물의 속성까지도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개의 이데아'나 '고양이의 이데아'뿐만 아니라, '필연성의 이데아'나 '무거움의 이데아' 또한 실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형이상학의 질문 중 하나인 '사물과 속성의 관계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해서, 플라톤은 '사물이 특정한 이데아에 관여하는 것이 사물의 속성'이라고 답한 셈이다. 또한 플라톤의 사상은 초기 [[기독교]] 교리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을 믿었으며, 또한 낭만적이고 초월적인 철학을 설파했다. 중세 철학은 때 플라톤 사상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으며 교부 철학의 이론적 토대는 플라톤주의가 주축을 담당했다.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에서 나와 플라톤과는 사뭇 다른 방향의 철학적 탐구를 개진해나갔다. 예컨대 실제 자연에 대한 탐구를 보다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문학]] 등 그야말로 다양한 학문 분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에서 현대까지 계승되는 주요한 관점들을 제시하였다. [[논리학]]을 실질적으로 창시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풍은 그가 아테네에 설립한 교육기관 뤼케이온에서 이어지게 된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및 [[고대 로마]] 시대 동안 아카데메이아와 뤼케이온 등에서 양성된 철학자들을 비롯하여 이전 철학자들의 영향을 계승한 다양한 철학자들 및 철학 사조들이 등장하고 번성하였다. 헬레니즘 시대 철학의 특징은 그 이전보다 더욱 개인적인 윤리의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이며, 폴리스의 붕괴와 제국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이에 영향을 끼쳤다. [[에피쿠로스]]로부터 비롯된 [[에피쿠로스 학파]]는 '절제'를 기초로 한 독특한 [[쾌락주의]]를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제시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이끌어냈다. 반면 [[스토아 학파]]는 격한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연의 순응하는 삶의 방식을 권하였고, 이러한 스토아적 삶의 방식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로마의 여러 유력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스토아 학파는 또한 [[논리학]]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있다. 더불어 [[플로티누스]]로부터 비롯된 이른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플라톤 철학의 신비주의적인 면모로부터 비롯된 [[관념론]]적 세계관을 개진하였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지형도 가운데 발전해나갔다. [[바울로]]가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 학파 및 스토아 학파와 논쟁하였다는 [[사도행전]]의 일화, 그리고 [[로고스]] 개념을 통해 [[예수]]를 설명하려 한 [[요한의 복음서]]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영지주의]]와 [[교회학자]] 간의 대립 과정 등에서 당대의 여러 철학 사조가 미친 영향은 중세 철학으로 이어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