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황 (문단 편집) == 위상 == 실권의 유무와 별개로 현대 일본에서 천황이 가진 상징성은 매우 크다. 저 유명한 [[고노 담화]](1993년)와 [[무라야마 담화]](1995년)도 앞서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때에 [[아키히토]]가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불행한 시기에 귀국민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며 저는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는 발언이 그러한 담화가 나오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쉽게 말해 '''천황이 '통석의 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고노 담화도 무라야마 담화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 내에서 여전히 존재감이 강렬하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주기 충분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135748#home|#]] 일례로 [[일본국 헌법]] 1조부터 8조까지가 천황에 관한 조항이다. 비록 정치적인 권력은 없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에게 신성 불가침적인 존재이며 언론에서도 함부로 다루지 않으며,[* 언론은 기본적으로 중립성을 위해 모든 인물에게 반말체로 말하지만, 천황만큼은 깍듯이 존칭과 경어로 보도한다. 심지어 진보 언론중 꽤 과격한 아사히 신문도 얄짤없다.] 대부분의 일본인들도 천황폐하라고 꼬박꼬박 존칭을 붙힌다. [[일본 만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황실을 소재로 한 건, [[마코 공주]]를 제외하면 거의 보기가 힘들다. 1990년, [[아키히토]] 천황의 [[차남]] 부부인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당시 [[가와시마 키코]])의 결혼을 기념하여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긴 하다. 이런 모습은 쇼와 덴노의 서거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천황이 중병에 걸렸다고 일본 내 모든 행사가 전부 취소되고 자숙(自粛)하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물론 처음엔 야단법석에 침울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해([[1989년]])를 넘어 질질 끌자 김이 샜는지, 쇼와 덴노가 사망한 당일에는 꽤 조용했다. 전임 제125대 천황인 [[아키히토]]는 사망하면 일세일원의 원칙에 따라 '헤이세이 덴노(平成天皇)'라는 시호가 추존될 것이 매우 유력하다 그러나 현행법상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적인 근거는 없고, 어디까지나 관습상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현재 생존중인''' 아키히토를 헤이세이 덴노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인 '시호'를 아직 살아있는 상황에게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금상(今上)이나 덴노 헤이카(天皇陛下) 등의 경칭으로 부른다. 물론 언론이나 공식 석상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천황제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일반인들은 사석에서 천황 씨(天皇さん) 정도로 다소 스스럼 없이 부르기도 한다. 덴찬(天ちゃん)같이 보수주의자 기준으로는 막 나가는 호칭까지도 쓰는 사람도 있다.[* 작가 아가와 히로유키(1920)가 썼다고 알려진 호칭이다. 참고로 그는 [[해군선옥론]]자로 육군식 천황 신격화를 혐오했지만 역사 교과서 수정은 지지하는 등, 딱히 우익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인물이다.] 아키히토의 즉위식을 준비할 때는 [[테러]]를 방지한답시고 [[도쿄도]] 경찰 전체가 동원되어 도쿄도 내의 모든 맨홀 뚜껑을 일일이 열어 확인한 후 봉인하는 유난을 떨었던 적이 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를 "진저리나는 바보 짓"이라고 표현했다.[* 참고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좌파]] 성향의 [[아나키즘|아나키스트]]이자 [[공화제|공화주의자]]다보니,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그리고 아무리 천황이 신성불가침이라도, [[일본]]도 사람사는 곳이다보니 [[쇼와 덴노]]의 죽음을 앞두고 각 방송사들이 자중한답시고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을 무기한 결방하자, 천황 하나 때문에 TV를 못 본다고 방송국마다 항의가 빗발쳤다. 그래서 우습게도 이 시기 비디오 대여점이 아주 장사가 잘 되었었다고 한다.] 또 당시 [[가이후 도시키]] [[일본 내각총리대신|일본 총리]]가 즉위식에 참여해[* 아키히토 즉위 당시의 총리는 [[다케시타 노보루]]였으나 헤이세이 개원 후 얼마 안 있어 [[리크루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후임 [[우노 소스케]]마저 스캔들로 사임하여 즉위식을 할 무렵에는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를 하고 있었다.] 축사를 하고 만세 삼창을 불렀으며, 일본 국민의 대표인 일본 총리보다 천황이 높은 단에 위치해 있었음을 들어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위 비용으로 소비된 약 400억 엔의 금액이 전액 국고 지원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조차 문제가 제기되어, [[가나가와현]]의 시민단체가 흔히 만세소송이라 불리는 소송을 걸었으나, 14년을 질질 끈 끝에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의해서 기각되었다. 이 시기 시의회에 참석했던 당시 [[나가사키시]] 시장이던 모토시마 히토시([[우익]] 성향의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가 좌익계열 정당에서 당선된 시의원과 이야기하던 중, 전쟁 책임에 대한 집요한 추궁 질문에 "천황에게도 [[쇼와 덴노/전쟁 책임|전쟁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가 글자 그대로 생명의 위협[* 협박을 비롯해 인터넷 개인메일 테러.]을 받기도 했다. 그 시장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일본 경찰]]의 철통 같은 호위를 받으며 청사 안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집으로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사태가 좀 진정되어 다시 출근했다가, [[1990년]] 차에 타던 중 우익 세력의 난동으로 등 뒤에서 발사된 총격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가 평소 우익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바른 소리를 시의회에서 한 번 했다가 생명을 잃을 뻔한 것이다. 나가사키 시장에 대한 테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임으로 당선된 시장 이토 잇초는 전임자와는 달리 중도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소 [[극우]] 정치인들의 [[일본]] 핵무장 발언이나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가, 2007년 [[야쿠자]] 출신 극우괴한에게 총격을 당해 끝내 사망했다. 핵을 맞았던 전력이 있는 나가사키는 극우 성향에 대해 반발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 때문에 극우파들의 정치 테러의 목표가 된 셈이다. 이런 일본 앞에, 천황을 독극물로 암살하려 했던 [[옴진리교]]가 목 날아간 꼴이 됐음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물론 [[옴진리교]]를 이토 시장 등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옴진리교는 일본 국가 전복을 꾀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무고한 생명을 살상했기에 더욱 큰 문제가 되었다.] 현재 황위 계승 서열 1위는 [[후미히토]] [[친왕]], 2위는 2006년에 태어난 아키히토의 유일한 손자인 [[히사히토]] 친왕. 200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밖에 없는 현 황실을 우려해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필두로 하여 [[여왕|여자도 천황이 될 수 있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하려 했다. 그러나 당일 차남인 후미히토 부부가 셋째 [[임신]] 중을 언론에 밝혀 무산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부부는 몇 번씩이나 아들인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히사히토]] 친왕(2006.9.6.)이 태어난 날, 아키히토 천황은 갓 태어난 손자에게 황실의 보물인 삼신기를 내렸다. 거의 [[출산]]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나루히토 천황 내외가 아들을 낳지 않는 한, 히사히토 친왕이 큰아버지 나루히토 천황의 황통을 이을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2011년에 [[일본]] 황족 23명 가운데 남자는 7명뿐인 사실을 감안하고 남녀평등의 여론이 불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214&aid=0000196322|여성 황족에게도 계승권을 주는 개정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아키히토]] 천황의 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2005년 11월 평민 공무원이자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의 [[가쿠슈인]] 동창이며 절친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하여 평민으로 신적강하되었다.[* 물론 말이 평민이지, 가쿠슈인을 다니며 황족과 친구로 지낼 정도였다면, 꽤나 좋은 집안일 가능성이 높다.] 2013년,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 비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 모습을 드러낸 데 대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6463773|논란이 일었다.]] 2013년 10월 31일에 [[야마모토 타로]] 참의원 의원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47&aid=0002038027|천황에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실태를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가 정치문제가 되었고 결국 국회에서 사죄해야 했다.]] 정작 [[아키히토]] 천황은 편지를 읽어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천황이 편지를 읽어 봤자, 전후(戰後) 체제에서 어차피 천황은 내각이 뻘짓을 하건 국민들을 어떻게 굴리건 진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법률로 금지된 정치 개입을 하려 했다는 의심만 살 수 있고 이 경우 천황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당 의원은 아예 "감히 신성한 천황에게 멋대로 자신이 쓴 편지를 건넨 놈"이라는 보수 극우들의 린치로 참혹한 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황은 편지 자체를 안 읽어 봤고, 내용도 단순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 실태에 대해 호소하는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꼴을 당했다. 만일 천황이 직접 읽어 봤고 내용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면 더 나쁜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야마모토 참의원은 황실 행사 참석 금지 징계에 [[극우]] 단체의 협박 편지까지 받았다. [[아키히토]]도 해당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편지를 읽지 않고 현장에서 그냥 측근에게 건넨 것으로 보이며, [[http://news1.kr/articles/1407997|해당 의원의 안위를 염려하기도 했다.]] 2014년 12월 23일, [[아키히토]]의 생일에 맞춰 [[트위터]]에서 [[https://twitter.com/hashtag/%E5%A4%A9%E7%9A%87%E3%82%AF%E3%82%BD%E3%82%B3%E3%83%A9%E7%A5%AD%E3%82%8A|천황합성축제]](天皇クソコラ祭り)란 게 퍼지면서 대규모 키배가 일어난 적도 있다. 2017년 5월 21일, 일본 보수인사 측에서의 천황에 대한 [[http://www.ytn.co.kr/_ln/0104_201705220027056898|발언으로 논란이 일었다.]] [[아키히토]]의 생전 퇴임을 논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베 신조]] 총리의 자문위원회 인사들 사이에서 "천황은 제사에서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을 뿐, 그것 말고 무슨 역할이 있는가? 궁중제사만 계속하면 굳이 퇴위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이 나왔고 [[궁내청]]도 이에 상당히 격분하며, "그간 천황이 국내외를 다니며 나라를 위해 기여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며 항의했다. 해당 자문위원회의 인사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측근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 지도층에서 천황을 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