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황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대한민국/역사|한국 역사]]에서 일본의 교섭 주체자 내지는 천황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이다. [[신라]]의 8대 군주 [[아달라 이사금]] 재위 20년(173)자를 보면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倭女王卑弥呼 遣使来聘)"고 하여 아달라 이사금 때에 왜국과의 교류 사실을 전하고 있다. 특히 왜의 여왕 비미호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히미코]](비미호, 卑彌呼)와 같은 인물로 보인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히미코는 일본 내 소국들이 서로 다투던 혼란한 시기에 여왕으로 공립(共立)된 인물로서 경초(景初) 2년(238)과 정시(政始) 4년(243)에는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사의 등장 시기가 173년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238년, 243년과 시간적 차이가 있어 사건의 진위여부를 놓고 이견이 존재한다. 이 기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비미호를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게 되면 그 수명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점을 문제 삼아 중국사서에 근거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조작으로 이해하고 반면에 삼국사기의 비미호 기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그녀가 왜국왕으로 공립되기 전에 야마타이국(邪馬臺國/邪馬台国)의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인사를 한 것이며, 그 연대는 [[신라]]의 고기록(古記錄)이나 구삼국사(舊三國史/旧三国史)에 기록되어 있던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절충론은 기사 자체는 인정하되 삼국사기 초기 연대의 왜곡을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히미코]]의 생몰기간이다. 히미코의 사망연대가 삼국지 위서 왜인전의 기록을 보면 247년경으로 되어 있는데 173년에 야마타이국 [[여왕]]으로 즉위했다면 최소한 75년 간 재위한 것이 된다. 비미호의 즉위시 연령은 확인할 길이 없지만 10살에 즉위하였다고 가정해도 최소 85살 이상은 생존했던 것이 된다. 만일 이러한 생몰기간이 가능하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기록에 등장하는 비미호 기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히미코는 왜국의 대표로 공립되기 이전에 이미 야마타이국 왕으로 재위해 있었고, 즉위 초년에 즉위 사실을 신라에 알리고 견사하여 우호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기록은 중국 문헌에도 전하지 않는 신라와 야마타이국 간의 교류를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후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일본 열도의 군주는 [[신라]], [[백제]], [[가야]] 구별없이 일관되게 '왜왕(倭王)'으로 등장한다. 왜라는 이름이 7세기에 들어서야 '일본'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사에서 일본 열도의 군주들은 전부 '왕'으로 불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는 일본서기에는 몇 번 기록이 나오긴 하지만, 고구려본기에는 왜에 대한 언급이 없다. >八年, 夏四月, 日夲國王遣使, 進黄金三百兩·明珠一十箇. >8년(882) 여름 4월에 '''일본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바쳤다. >----- >[[삼국사기]] 권제11 신라본기제11 헌강왕 8년[* 한국의 기록에서 일본으로 국호를 고친(670) 뒤 일본의 덴노를 '일본국왕'이라고 부른 최초의 기록이다. 정확하게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해야겠지만.] >大曆十四年己未, 受命聘日夲國, 其國王知其賢, 欲勒留之. 㑹大唐使臣髙䳽林來, 相見甚懽, 倭人認巖爲大國所知, 故不敢留乃還. >대력(大曆) 14년 기미(779)[* 신라 혜공왕 15년이다.]에 명을 받아 '''일본국을 방문하였는데, 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그를 억지로 잡아 두려 하였다. 마침 당의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와서 둘이 서로 만나 매우 기뻐하자, 왜인들은 김암이 [[당나라|대국]](大國)에도 알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감히 잡아 두지 못하였고 이에 돌아왔다. >----- >삼국사기 권제43 열전제3 김유신 하(下) 부 김암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원성대왕조에는 당 정원(貞元) 2년 병인 즉 786년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日本王文慶)''''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신라에 사신을 보내 [[원성왕]]에게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요구하였다고 되어 있다. [[일연]]은 여기서 '일본왕 문경'이라는 인물이 일본에 실제로 존재했던 군주인가 아닌가, 실존했다면 어떤 군주를 가리키는 것인가를 살피고자 《일본제기(日本帝紀)》라는 문헌을 끌어다 대조하며 고증을 시도했다. 현재는 전하지 않는 이 책에서는 일본의 55대 왕이 '문덕왕(文徳王)'이라고 전하고 있었고, 실제로 [[일본서기]]를 비롯한 육국사에서 55대에 해당하는 천황은 [[몬토쿠 덴노]](文徳天皇, 재위 850.5.31~858.10.7)로 《일본제기》라는 문헌과 대수가 들어맞는다. 몬토쿠 덴노는 일연이 본 《일본제기》에 등장하는 '일본왕 문경'과 그나마 연대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문경이라는 이름 자체는 《일본제기》에서도 살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연은 '일본왕 문경'이라는 인물에 대해 실존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신라에 만파식적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던 이 일본왕 문경이라는 존재 역시도 일본의 어느 호족이 스스로 '일본왕'을 사칭한 위사를 보낸 것일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있겠지만,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재미있게도 삼국유사의 해당 원문에서도 몬토쿠 덴노를 가리켜 문덕'왕'이라고 쓰고 있는데, 책의 제목을 일본'제'기라고 한 이상 일연이 참고했을 원본 《일본제기》에서는(이 책이 신라 시대의 저술인지 고려 시대의 저술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하게 '덴노(天皇)'라고 표기되어 있었고 이를 일연이 인용하면서 '왕'으로 고쳐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가 집필되던 당시 고려가 [[몽골 제국]]의 부마국으로 반복속되어 기존의 외왕내제로 운영되던 독자적인 황제국 지위 역시 모두 격하되어 있던 상태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황제'를 칭했던 송([[남송]])이나 [[금나라]]는 모두 원에 멸망당한 상태였고, 고려는 40여 년의 전쟁 끝에 고려의 왕조와 영토, 백성에 대한 통치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불개토풍'을 조건으로 원과 화친했지만, 고려의 왕이 자진해서 쿠빌라이 칸의 부마가 되기를 자처해 고려 왕실에 몽골의 공주가 시집오면서 이후 고려 왕실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몽골 문화가 침투했고, 몽골에 반복속된 신세로 행정 기구마저 원의 제후국으로 강등, 통폐합되는 수모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치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몽골의 일본 원정]](1274년, 1281년)도 이 무렵에 벌어졌던 일이다. 쇼토쿠 태자가 처음 수 양제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해 뜨는 땅의 천자가 해 지는 땅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라고 말한 그 유명한 문장은 쇼토쿠 태자 당대는 물론 후대의 고려나 중국 송 왕조 모두 알고 있었으며, 당대 고려나 송은 모두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 대해서 "내버려 두고 상대하지 말자"라는 이른바 '치지도외'의 자세로 일관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병먹금. 자기들 나라에서나 천황이라고 부르든 말든 알 게 뭐냐, 그 대신 인정은 못 해 준다, 라는 자세였는데, 현대 한국에서는 이때 고려/조선이나 송의 반응을 들어 그때처럼 천황이라는 칭호를 대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냐며 천황 칭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주요 논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천황 표기 논쟁은 주로 국내 언론 등에서의 표기에 대한 논쟁이고 국가간의 외교에서는 상대국의 표기에 따라 천황이라고 쓰고 있으므로, 치지도외의 원칙에 따르면 국내 언론에서는 일왕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상대국이 천황이라 주장하는 것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그 칭호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조선]]에서도 일본의 실권자는 [[쇼군]]([[막부]]의 최고 주권자)이며 천황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상징임을 파악하였다. [[신숙주]]가 이미 [[해동제국기]]에서 '일본 황실의 세계'를 자세히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막부에 권력이 넘어간 이래로,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천황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일본의 얼굴마담 정도였다. 오죽하면 용재총화에는 당시(15세기~16세기) 조선에서 '''딱히 쥐뿔도 없으면서 괜히 떠받들어지는 존재'''를 두고 "니가 왜황이냐"라고 놀려 부르는 말도 있었다고 언급될 정도니 옆동네 조선에서도 천황은 자국 내에서도 실권이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일본의 [[외교]] 주체는 쇼군이었고, 쇼군이 중국이나 조선에 대해 자신을 일컫는 말은 '[[일본국왕]]([[무로마치 막부]])'이나 '일본국 대군([[에도 막부]])'이었다. 이것이 잠시 수정된 것은 [[숙종(조선)|숙종]] 대의 일로, 아라이 하쿠세키가 건의하여 '일본국 대군'이라고 하던 [[쇼군]]의 칭호를 '일본 국왕'으로 상향시켜[* 이미 조선은 국초부터 일본측 외교 대상에 대해 '일본 국왕'이라고 불렀고 이건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가리킨다. 군주국끼리의 교섭인데 조선의 군주가 사신을 보내 교섭하는 일본측 총책임자가 일본 군주가 아닌 다른 존재여서는 당연히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칭하였던 것.] 이후 조선에서도 천황을 '왜황(倭皇)'이라고 부른 것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에서는 이 호칭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별 웃긴 놈들 다 보겠네'라는 비웃음 내지 병먹금 정도로 취급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애초에 가마쿠라 시대 이후 일본 전국의 군사권을 틀어쥔 [[쇼군]]에 의해 '관리'되는 처지로 쇼군이 '일본 국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에서 조선과 외교를 진행하고 있었고, 애초에 '왜황'이라는 단어에서 일본이 그토록 컴플렉스로 느끼는 '왜'라는 단어를 가져다 조어를 만든 것만 봐도 조선이 일본 천황의 존재를 얼마나 같잖게 봤는지 알 수 있다. 성호 이익이 살았던 조선 후기와 달리 신숙주 등이 살았던 조선 전기는 조선 후기처럼 성리학이 크게 자리잡지도, 교조적인 명분론이 그렇게 맹위를 떨치는 시대도 아니었다. 성호 이익은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쇼군은 엄연히 천황의 신하이고 쇼군이 무너지고 천황이 다시 복벽하면 그때는 외교 어떻게 할 거냐?"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신숙주나 조선 전기의 사람들은 그런 성호 이익의 문제 제기에 대해 쇼군이나 무사들이 실권을 쥔 당시 일본의 현실에 주목해서 "쇼군이 무너지고 천황이 복벽? 그때는 내전 좀 겪고 다른 쇼군이 나와서 또 실권을 잡겠지. 저 비실거리는 천황이 복벽은 무슨"이라고 치부했을 것이고, 버젓이 [[오닌의 난|천황이 싸우지 말라고 명령을 하거나 말거나 수도인 교토 안에서 27만 대군이 편을 갈라 싸우고]] [[센고쿠 시대|다시 전국적으로 백여 년 가까이 내란을 벌이는]] 그런 나라에서 별다른 힘도 못 쓰는 천황이 복벽을 해봤자 다시 쇼군 중심의 막부 정권의 재탕에 불과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당시 시점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막부]]를 무너뜨리고 [[겐무 신정|친정을 행했지만]] [[남북조시대(일본)|몇년 안 가서 말아먹고]] 도로 [[무로마치 막부|막부]]가 세워진 전례도 있었고 말이다. 심지어 그 메이지 유신조차도 천황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정권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막부 타도와 함께 [[대정봉환]], [[왕정복고]](1876)가 이루어지고 개혁([[폐번치현]], 근대화와 [[사무라이]] 폐지)이 시작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사신단이 대놓고 "일본 천황이 조선 국왕보다 의전서열이 높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에도 시대]] 말기부터 있었다. 일단 '천황'은 황제의 칭호중 하나였고 조선 국왕은 명목상 [[청나라]] 황제의 신하였기 때문에 '천황=[[황제]] > [[조선]] [[국왕]]'라는 논리였다. 일본은 막부가 존립한 시절까지만 해도 막부가 외교를 전담했는데, 심지어 [[쿠로후네 사건]](미국 페리제독의 무력적 개항요구)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서 총영사 해리스는 쇼군을 일본의 사실상 국가원수[* 문서에는 황제라고 했다.]로 간주하고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의 친서를 건냈다. 또한 [[미일화친조약]]이나 영일우호조약 등 각종 불평등조약에서 일본의 대표자로서 최종적으로 서명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사다(당시 [[에도 막부]]의 쇼군)였다. [[미국 정부]]나 [[영국 정부]] 역시 일본 조정이 아니라 막부를 협상대상으로 삼았음은 조선 조정과 다를 바 없다. 조선이 봤을 때 일본과 동등한 관계에서 화친해야 마땅하였다. 사실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에 빠진 당시 조선은 자신들을 '천하'라며 스스로 높임과 동시에 일본은 천하 바깥의 교화되지 않은 무리라고 여겨 서로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결국 조선 측에서 일본이 화친을 하고자 한다하여 여기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 주었다. 이후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대군주]]' 칭호로 격상시키고 [[대한제국]]으로 국제가 바뀌면서 '[[대한제국 황제]]'가 '대일본제국 덴노'와 명목상으로나마 동등해짐으로서 이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완전히 해결된다. 그러나 [[경술국치|한·일 불법병합]](1910.8.29.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이후 대한제국 황제는 왕공족의 일개 가문명으로 불리는 [[이왕|이왕가]]로 격하되면서 덴노보다 의전서열이 아래에 위치하게 되고 일본의 귀족인 [[화족]]보다는 높은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청나라는 [[1871년]]에 일본과 청일수호조규를 맺었는데, 이것도 엄밀하게 '대일본제국 천황'과 '대청 황제'라는 대등한 관계로서 국교를 맺었던 것은 아니다. 청나라 건국 이후 일본을 당시 통치하고 있던 [[에도 막부]]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지 않았던 상태에서[* 반청복명의 거두 가운데 하나였던 [[정성공]]이 보낸 [[주순수]] 등이 일본에 건너가서 원병을 요청하면서 조선의 [[강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성리학을 가르치고, 에도 막부에서는 정성공의 요청대로 대륙에 원병을 보내 명나라를 부흥시키자는 의론도 있었다. 내부에서 반대해서 그만뒀지만.] 청나라로서는 일본이 '''감히''' 자국 군주를 천황이라 부르며 '''청나라 황제와 맞먹으려 드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고''', 청나라는 일본이 기존의 조공-책봉 관계가 아니라 서구식의 '대등한' 외교를 요구했을 때 그것이 자국 중심의 조공-책봉 체제라는 기존 질서를 와해시킬 것을 우려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이때 [[이홍장]]이 나서서 "일본은 조선이나 월남과는 달리 조공-책봉 체제에 속해 있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일본과 수교하지 않으면 일본이 구미 열강에 붙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이유로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했고, 1871년 7월 조인된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와 ‘통상장정(通商章程)’은 '''그 체결 주체가 청나라 황제와 일본 천황이 아니라 청나라 전권대신 이홍장과 일본측 전권대사 [[다테 무네나리]]'''로 됐다. 명칭이 조약이 아니라 조규인 것도 '''청나라 황제의 특별한 배려로''' 청일수호가 이뤄졌음을 드러내기 위한 이홍장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6884|#]] 형식상 '''중국 황제와 일본 천황이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임명해 보낸 전권대신끼리의 외교 관계라고 간주'''한 일종의 편법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천황, 일왕이라는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1989년]] [[재일 한국-조선인|재일동포]] 지문날인 파동 이후 반일 감정이 상당히 격화되면서 언론에서는 일황, 일왕이라는 명칭만 사용하게 되었다. '일왕'이란 당연히 '일본 (국)왕'의 줄임말로 [[영국]] 국왕을 '영왕'이라 부르거나 [[태국]] 국왕을 '태왕'이라 호칭하는 경우는 없고 일본이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예전 한국의 언론에서 '영왕', '태왕' 이런 표기가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1997년]]까지도 존재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20208002091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02-08&officeId=00020&pageNo=2&printNo=8755&publishType=00010|#]][[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9022000329101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02-20&officeId=00032&pageNo=1&printNo=4255&publishType=00010|#]] '영왕' 표기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 보면 1947년부터 1999년까지 158건이 검색되고, '태왕'은 처음 등장하는 1959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15건이 검색된다. 1982년 2월 6일자 경향신문에서 조지 6세의 사망을 '영왕 조지 6세 서거'라고 사용한 것이 보이고, 1997년을 마지막으로 경향신문에서는 '영왕' 표기가 보이지 않는데, '영왕' 표기가 한국 언론에서 사라진 것은 아마도 [[영친왕]] 이은을 약칭하는 '영왕'이라는 표현과 헷갈릴 소지가 있어서였던 듯 보인다. '태왕' 표기도 [[1997년]] 1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전부터 죽 쓰이고 있었던 '영국 (국)왕' 또는 '태국 (국)왕'이라고 하는 표기가 한국의 각 신문지면에 주류 표기로 등장하게 된다.[* '영국 왕'이라는 표기는 1923년 3월 5일자 조선일보에 처음 등장한 이후 1999년까지 168건이 검색되고, '태국 왕'은 1950년 6월 1일자 조선일보 기사 이후 1999년까지 195건이 검색되고 있다. '일왕' 표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일왕' 표기를 검색하면 1950년부터 1999년까지 1778건, '일본국왕'으로 검색하면 1950년부터 1999년까지 51건이다. 중복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수치상 '일왕' 표기가 '영왕'이나 '태왕' 표기보다 많기는 하지만, 그것도 보도되는 기사가 많았던 만큼 표기가 많이 검색되는 것 뿐이지 대놓고 격하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한국과 일본의 거리, 한국과 영국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영왕'이나 '영국 왕' 표기 모두 같은 기간(1947~1999) 동안에 각각 158건과 149건으로 어느 한쪽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태국은 애매한 게 해방 전의 신문지상에서는 태국을 '섬라(국)'라고 부르고 그 왕도 섬라(국)왕/섬라황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것까지 치면 더 늘어날 여지가 있다.] [[영친왕|영왕]]이나 [[태왕]]이란 단어에는 다른 뜻도 있어 혼동의 여지가 있고, [[벨기에]] 등 한국 내에서 통용되는 한자국명이 따로 없는 다른 군주국 군주는 '벨기에 국왕'과 같이 풀네임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점을 감안하면 '일왕'이라는 호칭이 유독 자리잡기에 좋은 환경이기는 했다. 미국군을 [[미군]]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사례인 셈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호칭할 때는 '천황'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천황, 일왕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참여정부]] 때 [[독도]] 분쟁으로 천황 표기의 일왕(日王) 전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호칭은 '천황'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황을 공식 용어(고유명사)로 인정하고 이를 공문서 등에 명확히 사용하고 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430500258&wlog_sub=svt_023|#]] 명목상의 국가원수로서 필연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대 이후 강한 갈등 관계였던 [[한일관계]] 사이에서는 '천황', '덴노', '일왕' 등의 호칭 논란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갈등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존재다. 특히 천황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은 [[군국주의]] 시대의 만행이 천황의 이름을 걸고 행해졌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어, '일본(제국과 천황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범죄)의 대마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가 임종하기 전,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라고 당시 천황이던 [[메이지 덴노]]를 유언으로 나무란 사례가 있다.] 천황은 한때 [[일제강점기|식민지 조선]]이나 [[대만 섬|대만]]에서 해당지 총독을 임명하는 고유권한도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천황이 전쟁 책임은 면책받을 수 있어도 [[아시아]] 식민통치의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총독부의 직속 상관이 천황이 되므로 [[총독]]의 위치가 사실상 총리대신과 비슷했다. 실제 정치적 영향력은 본국 내각의 수장인 총리대신이 강했겠지만. 물론 1945년 패전 이후 [[식민지]]를 모두 상실함에 따라 총독 자체가 사라져 임명권한도 폐지되었다. [[쇼와 덴노]]가 공식상에서는 아니지만 황실의 풍습이 조선의 풍습과 비슷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이도학의 <새로 쓰는 백제사>에 실려 있는 일화인데, 기마민족 정복왕조설로 유명한 일본의 사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쇼와 덴노를 만났을 때에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알 길은 없지만, 중세까지 일본에서 "천황가는 조선(즉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인식은 존재했던 듯하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자신의 저서 신황정통기에서 [[간무 덴노]] 때까지 "일본 천황은 삼한과 같은 종족"이라고 적은 책들이 있었는데 간무 덴노가 그 책들을 싹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고 언급하기도 했고, 일본 사람들은 식사할 때 젓가락을 주로 쓰고 숟가락을 안 쓰는데 천황가에서는 숟가락을 쓴다더라[[https://www.economytalk.kr/news/articleView.html?idxno=19808|#]] 하는 얘기도 있다.] 전해지고, [[아키히토]] 천황 스스로가 '[[일본]]의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발언을 했을 때 [[한국]]의 소위 [[재야사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 근거가 [[고사기]]에서 [[무령왕]] - [[간무 덴노]]가 모계 방향으로 먼 연관이 있다고 한 문구 수준이었으므로 확대 해석은 삼갈 필요가 있다.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여진족 신라인설]][* 다만, 여진족 신라인설과 달리 한반도와 일본 천황 사이의 관계는 고사기를 비롯한 여러 고서적이나 신화/전승들과 관련되어 직/간접적으로 그 관계를 나타내는 근거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이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듯, 약 300년간 떨어진 이러한 머나먼 혈연 관계는 고대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일정 부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일본 황실]]의 혈통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근거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현 [[아키히토]] 천황이 외교적 수사[* 이 발언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양국간의 우호와 화합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 사돈의 팔촌 엮듯 자그마한 부분이라도 한일간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근거 동영상을 보면 "[[속일본기]]에 조상의 어머니가 [[백제]]계라 기록되어 있어 인연을 느낀다"고 했는데 그게 굉장히 과장되어 퍼졌다.]를 구사하였을 뿐이며, 오히려 저 발언을 악용해서 [[대한제국]] 병합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할 수도 있다는 [[떡밥]]도 있었고, [[일본 제국]]의 악명 높은 [[내선일체]]가 그 떡밥에서 피어난 부산물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땐 이마저도 큰 의미를 두긴 어려운 것이, 한 국가의 왕실이 다른 국가의 혈통과 섞이는 것쯤은 매우 흔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당장 20세기 초 유럽만 봐도 그렇고. 현재는 군주가 먼 옛날 피 좀 섞였다고 다른 나라를 병합할 수 있는 시대가 이니다. 애초에 [[대한민국 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전혀 의미가 없는 떡밥일뿐. 일단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호칭은 '천황'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황을 공식 용어(고유명사)로 인정하고 이를 국내외 외교 용어로써 사용하고 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430500258&wlog_sub=svt_023|#]] 한편 [[북한]]에서는 일본의 왕조 체제를 강조하기 위해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쇼군에게 부르는 칭호였던 '일본 국왕'을 천황에게도 사용하였으나 천황(天皇), 왜황(倭皇), 왜왕(倭王), 국왕(國王), 위황(僞皇, 가짜 황제), 기군(其君, [[그#s-2|그 나라]] 임금) 등 다종다양한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해 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