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진사변 (문단 편집) == 배경 == [[핍궁사건]]으로 자금성에서 추방된 푸이는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1929년 7월, 푸이는 [[톈진 조계#s-4|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안복파의 정객 [[육종여]]가 세놓은 집으로 이주하였다. 푸이가 믿고 있던 [[봉천군벌]]이 [[국민혁명]]으로 [[장제스]]에게 패배하고 봉천군벌의 새 수령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선포하면서 복벽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푸이의 유신들과 문객들도 흩어지는 등 푸이는 이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있었다. 하지만 푸이는 [[반장전쟁]]을 보면서 장제스의 치세가 생각보다 위태롭다고 판단하였고 복벽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정샤오쉬가 수차례 일본을 방문, [[고노에 후미마로]], [[우가키 가즈시게]], [[요나이 미쓰마사]], [[스즈키 간타로]], [[미나미 지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기요우라 게이고]] 등 일본의 정계와 군부의 실력자들을 두루 만나 복벽의 의사를 타진하였고 이들은 시기가 되면 지원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황고둔 사건]]의 주모자였던 [[고모토 다이사쿠]]가 육군 국무국장 [[고이소 구니아키]]와 결탁하여 푸이의 복벽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1931년 봄, 푸이의 유신인 [[뤄전위]]가 길림성을 방문하여 길림성의 지배자 [[아이신기오로 시치아]]를 만나 그와 복벽을 논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7월, 도쿄의 학습원에서 유학 중이던 [[아이신기오로 푸제]]가 방학을 위해 귀국한 상황에서 녹아도에 주둔한 일본군 대대장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로부터 편지가 왔다. 요시오카는 푸제를 초청하여 자신의 집에서 극진하게 대접한 후 몰래 푸제에게 "당신이 톈진에 가서 형에게 알려도 좋습니다. 지금 장쉐량이 떠드는 것은 다 말도 안되는 것들입니다. 머잖아 만주에 아마도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입니다. 선통제께서는 모쪼록 잘 보존하라 하십시오. 그분에게 희망이 없는게 아니에요!" 라고 귀띔하였다. 이어 푸제와 [[정샤오쉬]]의 안내로 일본의 미즈노(水野生邦) 자작이 방문하여 [[고다이고 덴노]]가 끝끝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겐무 신정]]을 다룬 시구가 쓰인 부채를 선물하였다. 얼마 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푸이는 몸이 달아서 만주로 가서 일본에 청원을 올려 복벽을 하고 싶었으나 정샤오쉬는 서두를 것 없으며 다만 사방에 연락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만주사변을 획책한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이하라 겐지]] 등은 만주를 [[국민정부]]로부터 독립시켜 신국가를 세우는 것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푸이를 주목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