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중밍 (문단 편집) === 몰락 === 하지만 천중밍 정권도 오래가지 못했다. 쉬충즈가 지휘하는 북벌군이 복건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동로토적군을 구성하여 동부에서 공격해왔고 운남, 광서에서도 [[양시민]], 유전환이 서로토적군을 구성하여 천중밍을 공격한 것이었다. 천중밍은 하야를 통전하고 본거지인 혜주로 퇴각하였고 1923년 2월 21일에 쑨원이 다시 광저우에 입성했다. 하지만 1923년 5월, 광서군벌 심홍영의 반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산터우, 조주 등을 장악하는 등 광동 동부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23년, [[펑파이]]가 주도한 소작료 인하 운동을 탄압하여 광동성 동부의 농회를 해산하였고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이 일어나자 광저우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때 객가군에 의해 약탈이 발생하였다. 천중밍은 1925년 국민당과 결렬한 [[탕지야오]]와 연계, 민치당을 조직하여 광동 동부에서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소련의 지원을 받아 창설된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된 국민당의 군세를 이길 수 없었고 [[국민당의 1차 동정]]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대리대원수 [[후한민]]이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하자 양시민, 유전환이 [[1925년 객군 반란|반란]]을 일으키고 8월에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벌어져 국민당이 혼란에 빠지자 천중밍은 이를 기회로 여겼으나 새로이 창설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수행한 [[국민당의 2차 동정]]에게 패하고 완전히 몰락하여 홍콩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다시는 정치에 미련을 두지 않았고 자신의 국가건설 사상에 대한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티푸스]]에 걸려 1933년에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