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천중밍 (문단 편집) === 쑨원의 북벌과 [[영풍함 사건]] === 천중밍은 일찍이 쑨원의 중앙집권적 통일방안에 대해 분명히 반대했고, 쑨원의 북벌이 무모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실패하면 자신의 연성자치론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당연히 쑨원의 북벌 운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양자간의 다툼은 쑨원이 전국적인 규모의 총통선거를 요구하자 천중밍이 이를 시기상조라고 비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끝내 쑨원은 총통에 당선되었고 쑨원은 천중밍에게 북벌 준비를 위해 많은 자금을 요구했다. 쑨원은 총통 자리를 앞세워 광동정부의 요직을 장악해 천중밍의 군사 재산을 침해했고 광동 정부의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이 때문에 천중밍은 크게 분노했다. 한편 북방에선 1920년의 [[안직전쟁]]과 1922년 5월의 [[1차 직봉전쟁]] 등으로 인해 북양군벌의 잔당들은 남방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이러다보니 적에 대항하기 위해 쑨원과 손잡을 필요성도 약해졌다. 게다가 쑨원이 데리고 있는 듣보잡 혁명가인 '''[[장제스]]'''란 자는 쑨원을 허풍선이로 여겨 비방하는 천중밍의 참모들을 보고 길길이 날뛰며 광둥정부에서 천중밍을 축출해야 한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천중밍도 불쾌해하며 쑨원에게 '무뢰배 장씨'를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 [[왕징웨이]]와 [[랴오중카이]]는 천중밍과 쑨원의 협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중간에서 뛰어다녔고 쑨원에게도 천중밍을 존중해줄 것을 요청했다. 쑨원의 중재에 장제스도 천중밍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쑨원의 북벌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지만 천중밍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쑨원 본인도 천중밍을 육군총장 겸 광동성장에 임명하라는 제의를 거부하고 천중밍과의 동맹이 실패했다고 선언하며 그를 면직시켰다. 이 때문에 천중밍 세력은 폭발, 천중밍 휘하의 예쥐와 12000명의 병력이 천중밍 복직을 요구했으나 쑨원은 단호히 거부했다. 이걸 계기로 결국 천중밍 세력은 쑨원과의 동맹을 완전히 청산하기로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천중밍의 연성자치론은 단순히 한 지역 잡아 해처먹겠다는 이기심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태평천국 운동]], [[신해혁명]], [[계축전쟁]], [[호국전쟁]], [[호법전쟁]] 등을 거치며 전화로 폐허가 되고 탐관오리와 군벌들의 착취로 인해 도탄에 빠진 광둥을 구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천중밍이 루룽팅을 축출하고 광둥을 점령했을 때 광둥 사람들은 천중밍의 자치주의에 환호하며 그를 환영하였고 천중밍은 안정적인 정권을 확립했다. 하지만 쑨원이 [[장쭤린]], [[돤치루이]]와 연합하여 반직삼각동맹을 추진하고 북벌을 시도하면서 천중밍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 사실 쑨원의 북벌이 다른 군벌들의 내전과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는 할 수 없어도 북벌 정책 자체는 군벌들의 학정 만큼이나 광동인들에게 부담이 된 것이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당과 자치주의자, 광동의 지식인과 신사층은 모두 북벌 정책에 대해 반대했다. 천중밍은 1922년 3월 21일, 쑨원의 참모장이자 북벌의 자금책이던 등갱이 홍콩에 다녀오는 길에 그를 암살했고 이에 격노한 쑨원은 천중밍을 육군부장을 제외한 모든 공직에서 면직시켜버리며 천중밍과의 동맹이 실패했다고 공언했다. 천중밍 역시 쑨원과의 합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결국 천중밍의 군대가 광저우를 포위하고 광둥성 은행에서 발행한 화폐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랴오중카이는 쑨원에게 천중밍과 담판하여 광동성을 안정화한 후에 북벌에 나설 것을 설득했으나 천중밍은 쑨원의 총통 하야를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다. 6월 12일 쑨원은 천중밍과 한 판 붙겠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했고 6월 14일 천중밍은 광동은행에서 자신의 잔고를 모조리 이체했다.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을 느낀 랴오중카이가 천중밍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갔으나 오히려 체포되었다.[* 랴오중카이는 62일간 구금되나 아내인 [[허샹닝]]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1922년 6월 16일 천중밍은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의 사령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쑨원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해군과 북벌군을 지휘하여 맞섰으나 북벌군은 패배하고 여러 함정이 천중밍에게 매수되면서 위기에 처했다. 결국 쑨원은 영국 조계지로 후퇴했다가 영국의 중재로 [[영국령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떠나게 되는데 부름을 받자마자 달려와 곁을 지켰던 [[장제스]]는 쑨원의 엄청난 신임을 받게 된다. 천중밍은 광동성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우페이푸로부터 광동과 강서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코민테른은 천중밍의 연성자치론 주장에 실망하여 그에게 관심을 끊었고 [[중국공산당]]은 천중밍을 비난하며 쑨원 지지 선언을 발표, 천중밍과 완전히 결렬했지만 자치주의자들은 쑨원의 축출을 연성자치론자의 승리이자 일종의 혁명이라며 환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