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자총통 (문단 편집) === 홍이포 관련 재반론 === 일단 천자총통은 1세대 부터 3세대까지 개량되어 조선 후기까지 사용된 포로 위의 설명과는 다르게 오히려 홍이포의 사용이 훨씬 제한적이었으며 각종 사료를 볼때 천자총통은 위와 다르게 꾸준히 사용된것이 분명한데 조선 후기 융원필비를 보면 천자총통의 제원과 설명은 소개하고 있으나 반대로 홍이포는 없다. 천자총통이 기록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이나 사실상 호칭의 문제인데 대부분의 대형 주조포는 대포로 명칭을 통일 하였으며 따로 재료명을 추가하는 선에서 기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가 되면 조선의 화포에 대한 기록은 아주 심플해지는데 대포 중포 소포로 전통적인 주조포를 표기하고 나머지는 대다수가 불랑기이다. 또한 천자총통의 사거리는 절대 짧지 않은데 천자총통이 수철연의환을 발사할 경우 사거리는 10여리에 달한다. 이는 융원필비에서 확일할수 있는 내용이며 대형 홍이포의 사거리 기록과 일치하는데 조선의 거리 측정 방식이 시대별로 중구난방인 면이 없지않아 있으나 영조 때와 순조 때의 도량형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므로 10리 라 하면 5,600m 가량이다. 보통 우리가 알고있는 천자총통의 제원은 조선 초 중기까지의 것이며 임진왜란기 천자총통은 1세대 와 2세대가 혼재되어 있는 형태이며 3세대 천자총통은 생김새 부터가 상당히 달라지고 탄환의 크기와 무게도 달라지는 만큼 이는 따로 논의해야 맞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약의 문제인데, 사실 컬버린과 같은 길이가 긴 포의 비효율성을 개선한 것은 갈색 화약이라 불리는 신 화약이 개발되면서부터 이고 그 전까지 흑색 화약으로는 상당히 비효율적인 구조였던 것은 맞다. 천자총통 3세대형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이유가 당시 흑색 화약에 대한 최적값을 찾아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에 대형 홍이포가 별 관심을 못받던 이유 역시 설명할수 있게 된다. 대형 홍이포는 호란 이후 몇번 언급된 이후 영조 때에서야 생산되는데 실제로는 양산을 하지않고 그대로 방치했다. 이후에 홍이포는 철제 주조포로 조선 후기에 어느 정도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오식도에서 홍이포를 소형화한 주철제 대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오식도 대포는 내경 축소 없이 소형화 한 것으로 보통 철제 주조포 제조 난이도는 대형 포보다 소형 포가 높다는걸 생각할 때 일부러 소형포를 주조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 또한 굳이 조선이 장사정 대형포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된다. 사실 당시 조선이 상정한 전장 환경상 대형 화포류를 운용할 이유가 없었는데다 화약생산량도 서구 제국(諸國)과 비교해서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운영할 여건이 부족했다. 서구가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전과 비교해봐도, 프랑스가 화약을 16세기 연간 500톤을 생산했고 식민지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에는 그 배인 1200톤으로 늘어났다.[* 유럽에서 화약이 대규모로 쓰이게 된 것은 [[남아메리카]]와 [[인도]]에서 대규모의 [[초석]] [[광산]]이 발견되어 들여오기 시작한 이후다. 인도의 초석은 당연히도 [[영국]]이 많이 썼고 남아메리카의 초석은 스페인이 들여와서 유럽에다 팔았는데 중간에 영국이 방해하면서 유럽에서의 화약값도 싼 편은 아니었다. 방해없이 초석을 조달했던 영국만이 [[레드 코트|병사]]들에게 실탄 사격 훈련을 시킬 정도로 넉넉하게 쓸 수 있었다.] 반면에 동시대 조선은 연간 화약 생산량이 2500여근으로 약 1.5톤이 한계였으며 군기시에서 보관하던 화약 또한 20여톤 정도였기에 본질적으로 어마어마한 화약을 먹어대는 대형 화포류를 꾸준히 개발하고 유지할 여력에는 한계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