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이(1883) (문단 편집) === 중일전쟁 === 일본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대만 주둔 일본군이 복건성을 침탈하기 위해 일본인 교사를 죽여 자작극을 벌인 사건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으며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에는 국민혁명군 25집단군(二十五集團軍) 사령을 맡아 푸젠성을 방어했다. 1941년에는 복건성 주석 자리를 유건서에게 내주고 임시수도 [[충칭]]으로 가 당정공작위원회 고핵위원회 비서장 겸 중앙훈련단 교육장으로 재임하였다. [[1943년]] [[카이로 선언]]을 통해 [[중화민국]]은 승전하면 1895년에 일본 식민지가 된 [[타이완 섬]]을 반환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국민정부]]는 이에 따라 1944년 4월, [[행정원]]에 대만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천이와 함께 정학계의 일원이었던 중앙설계국 국장 [[슝스후이]]의 추천에 따라 당시 최고의 대만통이며 중화민국 육군대학(현 중화민국 국방대학) 교장이었던 천이를 주임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천이는 <중앙설계국 대만조사위원회 조직규정(中央設計局臺灣調査委員會組織規程)>에 의거하여 대만 자료 수집, 대만 실제 상황 조사, 대만 자료 편집, 대만문제에 대한 의견 및 방안 강구, 인재 훈련, 대만 행정체계와 기구 접수 방안 등을 연구하였다. 천이는 대만이 50년이나 일본의 지배하에 있으며 대만인들 대다수가 중국어를 잊고 일본어를 구사하는 등 사실상 대만인들이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대만의 고급인력들이 대부분 일본인이니 대만 수복 후 고급인력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 여겨 1944년 12월 25일, 대만성행정간부 훈련반을 만들고 친임반 주임에 앉아 민정, 재정, 금융, 공상, 교통, 농림, 수산, 축산, 교육, 사법 등의 분야를 교육하여 120명의 간부를 양성했는데 이중 오로지 6명만 대만인이었다. 이후 <대만접관계획강요(臺灣接管計劃綱要)>를 편찬하여 대만 접수를 위한 청사진을 내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