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부레이 (문단 편집) === 국민당 합류 ===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어 북벌군이 난창을 점령하자 1927년 난창에서 장제스를 만나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였고 장제스의 제일 가는 측근이 되어 그의 개인비서로 활약했다. 1927년 장제스의 1차 하야 시기 그의 하야 선언문을 작성하였으며 1928년 장제스가 복직하자 절강성 정부 비서장과 교육청장, [[중국국민당]] 중앙선전부부부장, 교육부 차장을 지냈으며 1935년 군사위원회위원장 시종실 제2처 주임, 국방최고위원회 부비서장을 역임했다. 특히 시종실 제2처 주임을 10년 이상 역임했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의 최측근으로 통하며 국민당의 2인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사치를 모르는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고 장제스도 그를 부를 때 절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 부르며 존중했다. [[샤오위안충]] 등과 함께 언론활동을 통해 국가관을 통합시키는 선전활동을 수행했다. 1934년 장제스가 구술한 <적인가? 친구인가?(敵乎? 友乎?)>라는 논문의 초안을 잡았으며 이를 쉬다오린이라는 필명으로 외교평론의 1934년 겨울호에 개재하는 등 장제스의 항일의지를 선전하는 역할도 맡았다. >[[일본 제국|일본]]이 만약 다시 [[만주국]]과 같은 제2, 제3의 괴뢰조직을 조성하려고 한다면 최소한 30만의 육군을 파병해야지 겨우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의 상비병력은 총 17개 사단인데 전 병력을 보내도 충분하지 않고, 국내와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이므로,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예비역과 후비역을 징발하여 조달해야 할 것이다. (...) 일본이 만약 어떠한 이유로 중국에 무력을 사용한다면 중국의 군사력은 일본과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반드시 큰 희생이 따를 것이다. (...)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한다 해도 소위 정식적인 결전은 없을 것이며 (...) 전쟁을 종결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 일본이 점령할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양호한 교통망과 중요한 항구가 있는 약간의 도시와 중요한 항만에 불과할 것이다. >---- >적인가? 친구인가? 1936년 [[2차 양광사변]] 때 장제스를 수행하여 [[계계군벌]]의 수령 [[리쭝런]]과의 회담을 보좌했으며 1936년 [[서안 사건]] 이후 장제스의 명에 따라 서안 사건에 대한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을 담은 서안반월기의 초고를 작성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장제스를 곁에서 수행했다. 일본에 대한 승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 [[후스]], [[저우포하이]], [[천궁보]], 메이쓰핑, [[타오시성]] 등과 함께 저조구락부를 결성, 일본과의 화평을 주장했지만 [[왕징웨이]]처럼 일본에 투항하여 [[한간]]이 되지는 않았다.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자 승전에 기뻐하는 조카딸에게 "뭐가 즐거워? 정말 간고의 세월이 아직 뒤에 남아 있는데."라고 말하면서 국공내전을 예견했다. 중일전쟁이 끝났을 때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승전 공식 석명의 초안을 장제스가 직접 작성했다. [[중국 공산당]]도 천부레이의 문장력과 명망을 탐냈기 때문에 [[저우언라이]]가 충칭에 주재할 때 계속 천부레이에게 문안 편지를 보내 그를 공산당 쪽으로 회유하려 했지만 천부레이는 응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