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명제 (문단 편집) ==== 해서여진 복속 ==== 건주여진이 통합된 직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누르하치의 세력을 주시하던 명나라는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을 막기 위해 한반도로 향했고, 이틈을 타서 누르하치는 동쪽에 있는 해서여진을 통합하기 위한 작전을 짜게 되었다. 해서여진의 주요 부족은, 울라(烏拉)씨, 호이파(輝發)씨, 하다(哈達)씨, 예허(葉赫)씨 등 4개 부족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금나라]]의 후예를 자칭하고 있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해서여진은 건주여진보다 세력이 더 컸다. 같은 여진 동족이었지만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나라가 교역권을 가지고, 해서여진과 건주여진, 그리고 각 부족끼리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누르하치 이전에 두 여진 대부족의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명나라가 조선에서의 대일 전쟁에 정신이 팔린 동안,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해서여진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해서여진은 [[1593년]] 9월 [[구러산 전투]] 당시, 4개 부에다가 일부 몽골 부족을 끌어들여 9개 갈래의 병력 30,000명으로 병력이 10,000~15,000명이었던 건주여진을 쳤지만 누르하치의 눈부신 지휘 끝에 건주여진이 승리했다. 이때부터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주의를 끌게 되었으며, 명나라측에서는 이후 >'''군대가 위세를 떨치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軍威大震,遠邇懾服)''' 라며 우려를 표했다. 구러산 전투 이후,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슈르하치|슈르하치]]의 사이가 나빠져 누르하치가 동생을 죽이는 등, 형제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누르하치는 이후 하다부, 호이파부, 울라부를 차례차례 항복시켜 예허부를 제외한 해서여진을 휘하에 복속시켰다. 이 시점부터 누르하치는 여진족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 조선 사신들도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누르하치의 군대를 목격하고, [[광해군]]에게 이들이 절대로 야만족의 군대가 아니라 군율이 엄정하며 모두 갑주를 입을 정도로 무장도 충실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조선측은 누르하치를 "누르하치 추장"이라는 의미에다가 비하의 의미로 "종 노"([[奴]])를 써서 '''노추'''(奴酋)라고 불렀는데 광해군의 조선 조정에서도 이들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으며, 《[[광해군일기]]》에 160번이나 나올 정도였다. 광해군은 함경도와 평안도쪽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명령을 계속 하달했다. 두만강 동쪽, 현재의 백두산 동쪽에 살았던 야인여진은 문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부족 단위로 복속시키지 않고, 그냥 개인별로 팔기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야인여진도 부족별로 편제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가 후금 쪽으로 간 것은 맞다. 그래서 누르하치가 일어선 이후 함경도쪽의 여진족의 노략질은 없어졌다. 인구가 적었던 만주족의 형편상, 청나라는 산해관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넓은 의미에서 동족인 야인여진인들을 중국 본토로 데려와 만주족의 규모를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만주 - 연해주의 산악 지역에 살았던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분명한 여진족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만주족에 편입되지는 않았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의 전쟁 와중인 1606년 '''수러 쿤둘언 한'''에 등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