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명제 (문단 편집) ==== 건주여진 통일 ==== 누르하치는 이렇게 24세의 젊은 나이로 자기 일족의 [[추장]](수러 바일러)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그의 일족을 [[푸순|무순]]의 동쪽 지방으로 옮기고 다스렸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추장에 오른 것에 반대한 누르하치의 일족도 많았는데, 이들은 누르하치의 원수인 부족장 니칸 와이란과 손을 잡았다. 누르하치의 부족은 큰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병력은 100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래서 누르하치는 여동생인 가하샨과 사르후 지역의 추장이었던 노미나를 혼인시키고 그의 부족과 동맹을 맺은 후, 조부와 아버지의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려고 했다. 1583년 누르하치는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제거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는데 니칸 와이란은 번번히 도망쳤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작전이 자꾸 누설되는 것을 알고 동맹자인 노미나가 니칸 와이란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결국 누르하치는 노미나를 계략으로 죽이고 사르후를 차지했다. 이어서 니칸 와이란을 계속 추격했으나 친족이 배신하여 다시 중지했다. 누르하치는 친족들의 배신을 토벌했고 1583년까지는 모든 친족의 반항을 진압하여 이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1584년]] 동악부(동오 아이먼)의 족장인 아하이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누르하치를 두려워하여 먼저 싸움을 걸었다. 이에 양측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본거지인 허투알라에 돌아왔다. 상처를 회복한 누르하치는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뭉친 여러 여진 부족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9월에는 혼하부(후너허 아이먼)를 손에 넣었다. 1586년 결국 니칸 와이란의 거점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니칸 와이란은 명나라로 도망갔고,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명나라 측 지휘관이었던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달랠 겸, 니칸 와이란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누르하치에게 넘겨주었고, 누르하치는 그를 참수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는 주변 부족을 공격하여 1587년에는 저천(哲陳)부, 1588년에는 마지막으로 완안부를 복속시켰다. 이로써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8부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불과 병력 100여 명을 가졌을 뿐이었던 누르하치는 단 5년 만에 병력 15,000명의 병력을 가진 건주여진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