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명제 (문단 편집) == 여담 == [[https://m.cafe.naver.com/ImageView.nhn?imageUrl=https%3A%2F%2Fmcafethumb-phinf.pstatic.net%2F20160410_200%2Fgil092003_1460255968506uIgsS_JPEG%2F1%25B4%25A9%25B8%25A3%25C7%25CF%25C4%25A1_%25BE%25F3%25B1%25BC.jpg%3Ftype%3Dw1600|《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23~63세 누르하치의 모습]] * 고궁 박물관의 누르하치 화상은 실제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모습과 상당이 다른데, 홍타이지의 화상과 비슷하게 그리다 보니 실제의 모습과 많이 다르게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고궁 박물관의 화상은 누가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만주실록》,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등 각종 사서 및 기록에 따르면 공통적으로 체구는 크지 않지만[*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모습과 활과 화살의 길이에서 키가 크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게다가 머리도 크고 하체 또한 짧다. 물론 당시 만주족 평균 신장인 165 cm보단 큰 170 cm 정도로, 주변 장수들이 거구인 거지 단신은 아니었다.] 다부진 편이었으며, 턱수염은 없고, [[봉황]]의 눈[* 가늘고 길며 눈초리가 위로 째진 눈.]과 큰 귀를 지녔고, 얼굴이 길고 야무지며, 코가 크고 곧은 편이었다고 한다. * [[야사(역사)|야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수달]]이었다고 한다. [[수달]]이 누르하치의 어머니를 사모해서 밤에 찾아와 누르하치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덕분에 누르하치는 [[수영]]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한 도인이 찾아와 천자가 될 명당 자리를 알고 있는데, 물속 깊은 곳이라 자신이 들어갈 수가 없으니 누르하치에게 묻어달라고 부탁하고 부탁을 들어주면 누르하치에겐 왕이 될 명당 자리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먹튀|천자의 자리에 자기 조상의 유골을 묻어]] 결국 누르하치가 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전설은 왕조의 시조를 신격화하기 위해 만들어지곤 하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건 아니다. 수영을 잘 해서 별명이 수달이었다면 현실성이 있지만... * 누르하치는 [[유비]]의 [[오호대장군]]이나, [[칭기즈 칸]]의 [[사준사구]]와 비슷하게 후금 개국오대신(后金 開国五大臣)이 있었다.[* [[만주어]]로는 '''순자암반(ᠰᡠᠨᡷᠠ ᠠᠮᠪᠠᠨ)'''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누르하치와 의형제 사이였으며, 특히 누르하치 사후 후계구도에서 이들이 중심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후금판 [[왕자의 난]]이 발발하지 않고 제8왕자인 [[홍타이지]]가 안정적으로 칸위를 계승할수 있었다고 한다. 이하는 목록. * 피옹돈(費英東, Fiongdon): 구왈기야 씨족의 족장 가문인 구왈갸 하라(瓜爾佳氏) 출신. 누르하치의 맏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진만인적(眞萬人敵)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 어이두(額亦都, Eidu): 니오후루 하라(鈕祜祿氏) 출신. * 후르한(扈爾漢, Hūrhan): 퉁기야 하라(佟佳氏) 출신. 누르하치의 양자이기도 하다. * 호호리(何和理, Hohori): 동고 하라(董鄂氏) 출신. * 안피양구(安費揚古, Anfiyanggū)[* 본래 이름은 피양구이지만, 암바 알춘 구룬(대금국)에서도 알 수 있는 암바(대-, 크다)라는 접두어가 붙어 암피양구 > 안피양구가 되었다고 한다.] : 기오르차 가문 출신으로 누르하치의 호위병이기도 했다. 숑코로 바투루(송골매의 용사)라는 칭호가 있었다고 한다. * 개인의 전투력도 대단했다. 승마와 활쏘기는 당시 여진족 가운데에서도 최고라고 일컬어졌다. 전투에서도 항상 진두에 섰으며, 완안부의 전투에서는 선두에서 달려드는 적병 100여 명을 쓰러뜨리고 적진에 돌진했다고 한다. 저천부와의 대결에서는 누르하치와 부하 두 명이 800여 명에 포위되었으나, 순식간에 20명을 쓰러뜨리고 포위에서 빠져나왔다. * 약초상 노릇을 할 때, [[홍삼]]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은 홍삼의 가공법을 조선으로부터 전수받았을 수도 있다.] 명나라 상인들이 조선 [[인삼]]의 값을 떨어뜨리려고 인삼이 썩을 때까지 사주지 않자, 이를 쪄서 말려 가공하는 방법을 개발, 명나라 상인들의 얄팍한 수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 적에게 홀로 쫓길 때, 자신이 키우던 개가 적의 군마의 다리를 물어 쓰러뜨렸고, 이 때를 틈타 달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만주족이 개고기를 먹는 것을 금했다고 하여 만주족은 개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 [[삼국지연의]], [[수호전]] 덕후였다. 여러 유목민족 출신 정복왕조 개창자와는 달리 누르하치는 문맹이 아니었고, 어렸을 때 한문을 배워 중국고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삼국지에서 [[유비]]의 고사를 읽고 금나라를 부흥시키려는 포부를 가졌다고 한다. [[https://www.163.com/dy/article/F4AAS37J0519MVKE.html|#]] * 명나라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경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조선은 여진족이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여진족을 무시했고, 누르하치가 국서를 보냈어도 조선은 이전처럼 상당히 무례한 답신을 보냈다. 이미 건주여진을 통일한 후부터 조선에 우호관계를 맺자고 졸랐으나, 조선은 여진을 역사적으로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를 맺자는 이야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는 조선과 특별한 마찰은 벌어지지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누르하치 추장''' 약자의 의미에 비하의 의미로 "누"의 공식 음차인 "힘쓸 노"([[努]])가 아니라 "종 노"([[奴]])를 써서 '''노추'''(奴酋)라고 기록되었다. * [[임진왜란]] 때 지원군 지원을 두 차례나 제안하기도 했다. 1592년 8월에 조상의 나라[* 실제로 청나라 시절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백제와 신라 등 [[삼한]]이 만주의 원류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 이전 [[금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금사]]》에서도 완안씨 황실의 [[김함보|조상]]이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인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원군 지원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조선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지만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거절했다. 그리고 당시 여진 부족간에는 명나라나 조선의 인정을 받기 위한 충성 경쟁이 있었는데 이는 명이나 조선에 인정을 받으면 다른 부족에 비해 정치적 우위를 점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임진왜란이 거의 종료될 시점인 1598년 1월에도 "조상의 나라 원병"이라며 제안해서 조선 내부에서도 전투보다는 화친에 주력했던 명나라의 모습에 분개해 "원군 받아서 왜놈들 때려잡읍시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은 거절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을 '''조상의 나라'''라는 존칭까지 써가며 원군 파병을 제안했다. 물론 누르하치가 순수한 뜻에서 조선을 도우려 했을 리는 없고,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전쟁 중인 틈을 타서 원군이란 명목으로 조선 영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몽골 제국]]이 이와 비슷하게 [[강동성 전투|원군]]을 빌미로 [[고려]]와 접촉하고 영향력을 확대한 후 침략하여 굴복시켰던 예가 있다. 하물며 조선 중앙 정부에서 이걸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다만 최소한 첫 번째 원정 제안은 실제로 도우려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게, 전쟁 초반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이 [[만주]]까지 넘어와서 누르하치의 거점과 매우 가까운 성을 잠시 점령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당시 일본군이 전력으로 만주를 공격했다면 누르하치도 말려들게 될 것이었고, 당시 힘을 기르고 있었던 누르하치의 입장에서는 만주에 쳐들어오기 전 조선에서 미리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운 다음에도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관계는 매우 조심스러웠고, 명나라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7대 원한을 운운하며 선전포고했지만 조선은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를 물리치고 [[요동]]을 장악했는데, 조선이 명나라와 연합해 후금을 치려다가 참패한 [[사르후 전투]] 이후에 [[강홍립]]이 투항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강홍립을 억류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강홍립이 누르하치 앞에서 [[삼배구고두]]를 거부하자 불같이 화를 내고 조선 포로를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강홍립과 조선군의 항복을 협상한 둘째 아들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이 "포로를 살려주기로 약속했다."고 말리자 조선군 포로를 학살하려던 계획을 단념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군 포로가 탈출하여 그중 일부가 여진 부락을 습격하고 [[강간]] 사건을 저질렀고, 이 와중에 다수의 포로가 처형되었다. 어쨌든 여기에 연루되지 않은 포로는 살아서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파병군 1만 3천 명 중 3천 명 미만만 돌아올 수 있었다. [[강홍립]]은 누르하치에게 "우리 조선은 명나라의 의리 때문에 귀국과 별 원한이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참전하였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누르하치는 이를 받아들여 강홍립 및 조선 장수 포로들을 비교적 후대했다.[* 나중에 강홍립은 누르하치 앞에서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누르하치는 건국 이후 조선 조정에 계속 국서를 보냈고, 광해군은 이에 답서를 보내려고 했으나 광해군의 집권 기반인 [[대북]]파는 다른 당파보다도 오히려 더욱 극렬히 누르하치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해 몇년간 광해군 명의의 답서는 누르하치에게 가지 못하고 다만 평안도 감사의 명의로 누르하치에게 조선 조정의 뜻이 전달되게 된다. * 당시 조선에서는 칸에 오른 누르하치를 '''금국한'''(金國汗) 대신 '''건주위마법'''(建州衛馬法)으로 칭했다. [[광해군]] 또한 누르하치에게 서찰을 보낼 때 '''건주위마법족하'''(建州衛馬法足下)라고 써놔서 누르하치가 노발대발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위 칭호를 쓴다는 건 동등한 [[군주]]의 위치로 보는 게 아니라 일개 장수 및 지방관으로 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는 이렇게 자신을 무시하는 조선에 상당한 불쾌감을 가졌지만 주적이 명나라이며, 조선과의 마찰은 명나라에 [[어부지리]]를 안겨줄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의 장수인 [[모문룡]]은 요동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조선으로 도망쳤는데, 이를 추격하던 후금군[* [[아이신기오로 아민]] 지휘]은 압록강을 건너[* [[광해군]] 13년(1621) 12월 21일] 모문룡군을 추격했다. 모문룡은 후금의 기병대에 참패하고, 이후 바다에 약한 후금군을 피하려 철산 [[가도]]에 주둔하게 된다.[* 중국의 사료에는 조선 조정의 허가를 받고 모문룡을 추격했다고 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후금이 무단으로 넘어왔고 후금군은 용천 관아를 털어갔으나 조선의 인명은 살상하지 않고 명군만 공격했다고 한다. 이때 명군 및 유민 500여 명이 후금군에게 피살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다지 상세하게 나와았지 않으나, 후금측의 사료를 감안한다면 광해군이 조선군에게 대응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조선과 후금의 교전은 없었던 듯하다.] 광해군 시기에는 누르하치가 이렇게 조선과는 충돌을 피했고, [[광해군]]도 [[명나라]] - [[후금]] 사이에서의 [[중립]]을 지켜 [[조선]]과 후금 간의 충돌은 없었다. 다만 이후 [[인조]] 정권이 노골적인 반청(反淸) 정책을 시행하면서 양국의 사이는 악화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