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명제 (문단 편집) == 업적 == * 팔기 제도 및 [[팔기군]] 확립 [[여진족]] 특유의 제도이자 경제와 사회 단위 겸 전쟁 당시 분대의 역할에 해당하는 '''[[팔기군]]'''을 편성했다. [[19세기]]가 되면서 팔기군은 무용지물이 되긴 하지만, 적어도 [[청나라]] 초기에 대륙을 장악하는데는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 [[만주 문자]] 제정 [[만주어]]를 기록하기 위한 [[만주 문자]]를 확립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이 자신의 언어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현상을 안타깝게 여겼다. 물론 이 당시에도 [[여진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인 [[여진 문자]]가 이미 있었지만, 글자수가 너무 많아 익히기가 너무 불편해서 쓰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주로 [[몽골 문자]]로 [[여진어]]-[[만주어]]를 표기했지만 표기법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건 아니라서 [[중구난방]]에 가까운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1599년 어르더니 박시와 가가이 자르쿼치로 하여금 몽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만주 문자를 개발했다. 이들은 몽골 문자에서 표기가 불가능한 [[만주어]]의 음을 표기할 수 있는 자모를 추가했다. 그리하여 만주어의 표기법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고, 이 만주 문자는 이후 계속 쓰이지만, [[19세기]]가 되면 [[만주족]] 대부분이 모어로 [[한어]](=[[중국어]])를 사용함에 사용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 국가 체제 정비 [[여진족|건주여진]] 시절부터 [[명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정부 기구를 구성하고, 조정과 6부를 두었다. [[만주족]]이 [[아이신기오로 도르곤|북경을 점령한 후]], 그대로 명나라의 6부를 접수하여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 [[농업]] 장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 미개 상태를 청산하고 문화 민족으로 발돋움하려면, 농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반농반목]]ㆍ[[수렵채집인|수렵-채집 민족]]이었던 [[만주족]]을 농경 민족화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점령지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지르던 [[몽골]]과는 달리 점령지의 [[한족]]들을 그대로 두어 생업에 종사시키고, [[후금]] 시절에는 [[만주]]를 개간하기 위해 [[인간 사냥|화북에서 수많은 한족 포로들을 납치해 와서]]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시켰다. 반(半) [[유목]] 민족이었던 [[만주족]]을 [[정주#s-1|정착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을 함께 살게 했지만, 이는 민족 갈등을 부르는 역효과를 냈다. * [[상업]] 장려 만주족 경제는 [[물물교환]]으로 돌아갔지만, 누르하치는 [[화폐]]도 도입했다. 물론 당시 만주의 경제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던 데다가, 화폐를 주조할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는 별로 효과가 없었고 화폐 경제가 발달한 [[명나라]]를 점령한 후에야 만주족은 화폐를 널리 사용했다. * 대(對) 몽골 정책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몽골 제국|몽골의 흥기]]를 막지 못해 망해버렸다. 누르하치는 이를 교훈 삼아 [[몽골족]]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금이나 청나라 황제는 스스로 '''[[몽골]]의 [[대칸]]'''을 자칭했다. 자신들에게 순응하는 몽골 부족들을 후금 체제로 끌어들여 팔기에 소속시켰다. 이들은 대대로 청나라 황실과의 결혼을 통해 청나라의 귀족 계급 노릇을 했고[* 제1민족 바로 밑의 제2민족으로서, [[원나라]]에서의 [[색목인]], [[고대 로마]]에서 [[이탈리아]]가 확실히 본국으로 자리매김하던 [[로마 공화정|공화정]] 말기에서 [[군인황제시대]]까지의 [[그리스인]]과 비슷하다. 청나라 조정은 대외적으로는 만한(몽) 일체를 주장하면서 관리의 수도 만족+몽고족 대 한족의 동수로 맞추었지만, 한족과 만주족+몽고족 인구비는 거의 1:100에 가깝기 때문에 차별이 있었다.], 몽골 기병들은 만주병들이 맛이 간 19세기까지도 청나라의 온전한 전투력으로 남았다. 이렇게 만주족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내몽골]] 여러 부족들은 스스로를 중국의 일부라고 간주했고, 결국 [[20세기]]가 들어서면서 [[외몽골]] 부족들이 [[몽골|몽골 공화국]]으로 중국에서 독립할 때도 중국에 남았다. 이 또한 넓게 보면 몽골을 포섭하려던 누르하치의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