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명제 (문단 편집) === 죽음 ===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재기불능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소수 정예의 철기병이 중심이 된 후금 / 청군은 [[공성전]]에 유달리 약했고, 요양 및 심양을 공략할 때도 계략으로 명군을 성밖으로 끌어내거나 혹은 성안의 세작으로 [[공작#s-1]]을 펼친 후 함락시킨 것이었다. 10여 년 이후 [[병자호란]]때도 끝내 [[남한산성]] 자체는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강화도]]를 함락시켜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송산전투]]때의 금주성도 포위만 하고 있다가 식량을 모두 소진시켜 항복을 받았다.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도 마찬가지로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고, [[산해관]]도 결국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를 지키던 장군인 [[오삼계]]가 항복하고서야 넘을 수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홍이포를 맞고 부상을 입어 이후 이 부상을 이기지 못하여 붕어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영원성 전투]] 이후 겨우 석 달 만에 누르하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몽골 고원]]으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자신들의 군주가 부상을 입었다면 본진인 [[요동]]으로 돌아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는가?[* 기록에 따르면 당시 명군의 화포에 맞아 사망한 사람은 누르하치가 아니라 그의 친족일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http://gil092003.egloos.com/9746218|#]]][* 다만 몽골의 [[칭기즈 칸]]이 낙마로 인해 머리를 다치는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서하]]에 대한 공격을 계속 진행해 멸망시킨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작정 가능성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영원성 전투에서 일생 처음으로 참패하여 체면을 구긴 누르하치는 땅에 떨어진 후금군의 사기를 되살리려 했고 영원성 전투 3개월 후인 5월, 직접 내몽골로 친정하여 [[할하]]부를 정벌하고 이들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6월에 몽골 귀족인 오오바 훵 타이지가 후금의 수도인 심양으로 찾아오자 직접 걸어나와 맞이한 행적도 있다. 1626년 8월 11일 67세 나이로 붕어했다. 청나라의 기록에는 "병으로 죽었다."라고 나온다. [[홍이포]]에 부상을 당해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홍이포에 맞았으면 즉사하거나 아예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제(전한)|한 고조]] 같은 케이스를 보면 죽음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부상을 입고 멀쩡히 다니다가 죽기도 한다. 더구나 홍이포에 입은 부상이 본래는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지 않았거나 치료를 받아 완화되는 도중 당시 나이로는 고령이어서 갑자기 덧나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홍이포에 부상을 입었다고 즉사하거나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논리로 삼기에 부족하긴 하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아예 홍이포에 맞지도 않았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누르하치가 진짜 홍이포로 인한 부상으로 죽었는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다만《[[만주실록]]》등의 기록에서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 패배를 자책하는 걸 보면 그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아직 공성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후금 입장에서 영원성 전투 패배는 자신들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한 것으로, 누르하치에게는 사실상 [[산해관]] 입성이 저지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좌절감이 병으로 이어져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 평균 수명을 훨씬 넘긴 68세로 사망한 것을 보면 사실 살만큼 살다가 사망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의 뒤를 8남인 [[숭덕제|홍타이지]]가 이었다. 1636년, 홍타이지는 후금의 국명을 '''대청'''으로 개칭했고 누르하치는 청나라의 [[태조]]로 불리게 되었다. 사후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복릉(福陵)에 안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