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명제 (문단 편집) ==== [[영원성 전투]] ==== 후금은 [[만주]]를 거의 장악했지만, 명나라의 하급 무관이었던 [[모문룡]]은 명나라의 패잔병을 모아 조직한 후 [[조선]]의 철산 [[가도]]에 주둔하여 후금군을 치고ㆍ빠지기 수법으로 괴롭혔다. 특히 수군을 동원하여 [[요동반도]]와 [[요하]] 강을 거슬러 올라가 후금의 심장부인 심양이나 [[푸순시|푸순]]까지도 공략하곤 했다. 이 때문에 후금은 전군을 대명전에 투입하지 못하고, 요하나 [[요동반도]] 방면의 수비에 할당해야 했는데, 이것은 인구와 병력이 부족한 후금에게는 큰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명나라도 1620년대부터 중국 전역에서 농민 반란이 발발하여 대후금전에 전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명나라는 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산해관]] 이북의 모든 병력을 이남으로 철수하여 [[만리장성]]을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하지만 병부주사인 [[원숭환]]은 이에 반발하여 산해관과 만주의 중간에 있는 영원성에서 농성하자고 주장했다. 원숭환의 전략은 영원성을 지키되, 후금이 영원성을 우회하면 영원성에서 출진하여 후금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었다. 결국 원숭환의 주장이 채택되었으나, 명나라에서는 1만 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원숭환에게 후금군을 막도록 했다. 1625년까지 후금군은 끈질기게 후방에서 괴롭히던 [[모문룡]]군을 몰아내고 [[뤼순]]을 탈환하여 요동 반도를 평정했다. 이어 누르하치는 전 병력인 6만 명을[* 영원성 전투 항목에는 후금군 총병력이 16만 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산해관 입관 이전에 후금-청나라의 총 실전 병력은 10만 명을 넘긴 적이 없었다. 16만 명은 아마도 병사들에게 딸린 종이나 노비까지 합한 수일 것이다. 10년 후인 병자호란 때도 전투 병력은 6만 명이었고, 18년 후 [[도르곤]]이 [[오삼계]]의 인도로 산해관을 넘을 때도 마찬가지로 청군의 총병력은 6만 명 남짓했다.]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영원성을 공략했다. 이때 [[원숭환]]이 지휘하는 수비 병력은 1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영원성은 성벽이 견고했고 [[홍이포]] 11문을 비롯한 수성용 병기들을 대량으로 운용했다. 1626년 2월 10일부터 22일까지 벌어진 농성전 끝에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이를 [[영원성 전투]]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