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관녀 (문단 편집) == 생애 == [[고려]] 시대의 문인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破閑集)》에 적혀 있는 이야기다. 화랑이던 젊은 시절의 김유신은 천관녀를 사랑해 그녀와 교제했다. 어느 날 어머니 [[만명부인]]이 그 꼴을 보고는 "나는 이제 늙었다. 네가 커서 공을 세워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줄 날을 밤 낮으로 고대해왔는데 어찌 너는 [[주색잡기|술과 여자나 쫓아다니느냐]]"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김유신]]은 그 뒤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해서 다시 그 집에 들르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음주운전|술에 취한 채 말에 타고 집에 돌아가던 중]] [[귀소본능|자신의 말이 버릇대로 그녀의 집 앞에 멈춰서는 일이 생겼고]] 천관녀는 반갑게 김유신을 맞이한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김유신]]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천관녀를 부르짖으며 [[말(동물)|말]]의 [[참수|목을 그대로 베어 죽여 버렸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최초의 [[자율주행]] 사고 사례~~, ~~그러게 대리기사를 부르지...~~ 현재 [[김유신]]의 집이었던 제매정택과 천관녀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천관사는 직선 거리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사람이 천천히 걸어가면 약 10분 안에(열심히 걸으면 7분 안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중거리 달리기 경주를 생각해보자--] 천관녀는 김유신의 무정함을 원망하며 《원사(怨詞)》라는 [[향가]]를 지었다고 하며[* 현대에는 전하지 않으나, 한편 이것이 [[원가]]와 같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김유신의 결단에 감동하여 신녀직을 그만두고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지내다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후에 김유신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천관녀를 찾았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터라 천관사라는 절을 그녀의 집 자리에 지어서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 천관사라는 절은 500여 년이 지난 고려 중기 이공승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쓴 것이 남아있어 그때까지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은 터만 남았고 [[대한민국의 사적]] 제340호로 지정되었다. 천관사지에 가면 반쯤 무너졌던 석탑을 재건해놨고 말의 목을 자른 그림이 걸려있다. 한편 '대태각'이라는 문구가 쓰인 신라시대 돌조각이 1974년 [[경주시]] 교동 천관사지 동편에서 발굴되었다. 이는 [[태대각간]]을 의미하는데 신라 최고의 관직으로 너무 높은 지위라서 중국의 [[상국]]처럼 신라 역사를 통틀어 생전에 이 관직에 오른 사람은 김유신 밖에 없다.[* 살아서 오르지는 못했지만, [[김인문(신라)|김인문]]이 사후 추증된 적이 있다.] 사실상 김유신 전용 관직이다. 이 문구가 천관사의 옛 터에서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실제로 천관사를 지은 것이 김유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천관녀가 나오는 이공승이 지은 시를 보면, [[고려]]시대 사람이 보기에도 김유신이 말을 베어 죽인게 너무하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 절 이름 천관은 옛 사연이 있는데, 홀연히 그 유래를 들으니 처연하다. 정 많은 공자가 꽃 아래에 놀았더니, 원망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이 말 앞에서 울었네. 말은 유정하여 도리어 옛길을 알았는데, 유신은 무슨 죄로 부질없이 말을 몰아왔는가. 다만 남은 한 곡조의 가사가 묘하게 남아 세월따라[* 원문은 蟾兎同眠(섬토동면)으로 두꺼비와 토끼가 함께 잤다는 뜻인데, 옛날 사람들은 달에 두꺼비와 토끼가 있다고 믿어서 蟾兎가 곧 [[달]]을 의미했다. 자세한건 [[달두꺼비]], [[달토끼]] 문서 참고. 하여 달이 잤다는 뜻이니 [[태음력]]이 기준 역법인 시절이라 세월이 흐른다는 것을 시적으로 뜻한 말이다.] 만고에 전해지네. 천관은 그녀의 이름이라. 이걸 보면 고려시대에 남아있는 천관사는 불교의 사원이니, 설사 신녀설을 따라 원래 천관사가 토속 신앙의 신궁이었다 할지라도 김유신이 나중에 새로 지은 천관사는 불교 사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맞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도 천관녀에 대한 사연은 없지만, 천관사라는 절이 언급되기는 한다. 661년 2월 [[김유신]]이 [[김인문(신라)|김인문]], 김양도 등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우회하여 평양에 고립된 [[소정방]]에게 [[평양성 전투(661년)|군량을 공급할 때]][* 이때 김유신이 소정방을 구원하지 않았다면, 고구려군에게 죽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서자]] 김군승(金軍勝)이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김군승을 김유신과 천관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김유신이 늦은 나이에 [[김춘추]]의 딸과 재혼하기 전에, 이미 장성한 자식을 뒀을 것이라는 것. 김유신이 지소부인 이전에 교제한 여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천관녀뿐이고 결국 정식 혼인은 하지 못해 아들을 낳았다면 서자가 되었을테니, 현재로선 추정 가능한 후보는 천관녀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