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계제 (문단 편집) == 생애 == ||[[파일:e66616ba4b784d0d99f71acf77ffb9e8_th.jpg|width=250]]|| 15대 황제 희종 주유교는 태창제 주상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력 41년(1613) 주상락이 태자였을 때 태자비 곽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다시 태자비를 책봉하지 않았다. 그는 정귀비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 측실부인 중에서 태자비를 고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재인, 선시, 숙녀 등 품계가 낮은 측실들이 있었을 뿐이다. 만력 33년(1605) 재인 출신 왕씨가 주상락의 장남 주유교를 낳고 만력 47년(1619)에 사망했다. 신종 [[만력제]]는 장남 주상락을 냉대했다. 주상락의 생모 왕공비가 신분이 천한 궁녀 출신이라고 싫어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간사한 정귀비의 간계에 놀아났기 때문에 장남을 멀리했다. 만력제의 장손으로 태어난 주유교도 조부의 관심 밖에 있었다. 아들이 미워도 손자는 예뻐함이 인지상정인데도 만력제는 그렇지 않았다. 역시 정귀비가 걸림돌이었다. 주유교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정귀비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 어린 시절을 불안하게 보냈다. 나이 어린 주유교가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음산한 궁궐에서 유일하게 즐긴 일은 목공예였다. 16세 어린 나이로 즉위해 23세로 요절하기까지 7년간 재위했다. [[명나라]] [[암군]] [[명 4대 암군|F4]] 중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데, 그 7년 동안 [[목수]]질만 하다 죽었다. 특히 즉위한 이후에는 조부 만력제가 망친 국정을 쇄신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그의 관심사는 여전히 목공예였다.[* 그래서 환관 [[위충현]]이 신하들의 상소를 천계제에게 전달할 때는 꼭 '''천계제가 목공예에 열중일 때만 노려서''' 보고했다고 한다. 목공예 한참 빠져 있는데 불쑥 처리해야 할 국정 상소를 가져와 폐하께서 처리하셔야 한다고 하니 천계제는 짜증내면서 "아 니가 알아서 해"라고 내뱉었고, 그걸 또 위충현은 '황제께서 내게 맡기셨다'며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해 버렸다고.] 황제가 불쑥 나타나 십장처럼 목수들을 진두지휘했다. 이때 천계제는 친히 대패질하고 가구를 만드는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 건청궁의 미니어처를 정원에 '''완벽 재현'''할 정도였다. 허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마에스트로#s-1|마에스트로]]가 아니라 '''대명국의 황제'''였다는 것이다. [[송휘종]]과 마찬가지로 천부의 재능이 있었으되, 재능을 살리는 직업 대신 분수에 넘치는 지위에 앉아 자신과 나라를 함께 망쳐버린 케이스. 당시에 목공은 시시한 취미가 아니라 돈벌이도 잘 되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며 평가도 높은 직종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황제가 할 일은 아니긴 하다.[* 자세한 건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067540|이 글]]을 참조. [[루이 16세]] 항목도 함께 참고. 차라리 [[압뒬하미트 2세|권력이라도 확실히 붙들고 이것저것 해 봤으면]] 취미 때문에 저평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틈만 나면 [[귀뚜라미 싸움]]을 즐겼다. 사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가정사 탓이 크다. 어머니 왕재인(王才人)을 죽인 새어머니 이선시(李選侍)가 연루된 [[명말 3대 의안#s-5|이궁안]]이 벌어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명말 3대 의안#s-5]] 항목 참고할 것.] 여하간 [[만력제]] 시대의 각목 테러 사건인 [[명말 3대 의안#s-3|정격안]], [[태창제]] 의문사 사건인 [[명말 3대 의안#s-4|홍환안]] 그리고 이 막장 집안 싸움 이궁안이 [[명말 3대 의안]]이다. 이때문에 천계제는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었기에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정사를 모두 넘긴 뒤 취미 생활인 [[목공]]과 [[귀뚜라미 싸움]]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위충현]]은 전횡을 일삼아 [[부정부패]]와 [[매관매직]], [[뇌물]]이 끊이지 않고 별의별 막장 짓을 일삼았다. 그렇게 환관 위충현이 이선시와 결탁하여 천계제의 무능함과 무관심을 이용해 난동을 부려 명나라의 정치를 막장으로 만들었을 때 명나라는 여진족이 [[요동]]을 다 장악하고, 농민들은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던 중 천계제가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요절한다. [[뱃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어지면서 물에 빠졌는데, 코피를 심하게 흘렸고 과거 [[정덕제]]의 죽음을 너무 염두에 둔 나머지 생긴 [[노이로제]]가 사인이었다.[* 왕공창 대폭발 후유증으로 병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때는 천계제의 유일한 아들인 헌회태자마저 요절했기에 본인도 이에 충격을 받아 거의 [[기절초풍]]한 상황이었다.] 또한 [[방사]](= 방술사)의 말을 믿고 옛 [[금나라]] 황릉 일대를 파괴했다. 천계제는 [[천명제|누르하치]]가 저렇게 잘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금나라]] 황릉의 왕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여진족]]의 용운이 아직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 '''"[[풍수]]를 파괴하고 용맥을 잘라 왕기를 없앤다."는 '신묘한 방책'을 받아들였다.''' 그는 군대를 보내 금나라 황릉 지역[* 여담이지만 이것을 만든 사람은 '''[[금나라]]의 [[폭군]] [[해릉양왕]]'''이다.]을 파괴하고 불지르고 뽑은 다음 그 일대 산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물론 예전에 [[금나라]]가 멸망할 때 [[몽골 제국군|몽골군]]들이 마구잡이로 [[도굴]]했기 때문에 딱히 남은 건 없었다. 하지만 [[천하통일|중국 통일]] 후에는 같은 민족으로 보고 복구를 해서 [[원나라]] 때는 명소였다.] 게다가 천계제는 인원을 두 차례 파견하여 지상, 지하, 바깥, 내부까지 구룡산 능원에 있는 금나라 황릉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파냈다. 지상의 모든 건축물을 철거한 후 각 황릉의 지궁을 파헤쳤고, 땅바닥에 흩어진 석주나 난간 같은 건축 부자재와 돌멩이로 묘실을 메워버렸다. 이런 방식으로 여진의 왕기를 단절시키려 했으며, [[풍수사]]의 조언대로 [[태조(금)|금 태조]]의 예릉이 있던 용두에 있는 흙을 파헤쳐서 용머리를 자르고, 용머리 아래에 있는 목 부위에도 큰 구멍을 파놓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6%98%8E%E7%86%B9%E5%AE%97%E5%83%8F.jpg|width=250]]|| 또 예릉이 있던 자리에는 고탑(皐塔)을 세웠는데, 그 이유는 [[관우]](關羽)와 [[남송]](南宋)의 [[명장]] [[우고]](牛皐)의 영혼을 불러내서, [[명나라]]가 [[천명제|누르하치]]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후금]](= [[청나라]])이 강성해지자 그들의 조상들인 금나라 황제의 무덤을 파괴하여 막아보려는 주술적인 행위였으나, 이는 같은 여진족인 후금을 빡치게 만들어 침략원인을 제공하는 최악의 판단이었다. 이를 '''천계 굴릉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후세의 [[고고학자]]들에겐 큰 골칫거리를 던져준 셈이었다. 이때 건립한 관제묘와 탑은 지금도 남아있다. 천계제가 [[암군]]이 된 데는 똑같은 암군인 할아버지 [[만력제]]의 책임이 가장 크다. 앞에서도 썼듯이 만력제는 후궁 정 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정 귀비의 아들인 복왕 [[주상순]]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대신들이 장자승계의 원칙을 들어 강력히 반대하여 크게 갈등하다 결국엔 실패했다. 그런 알력이 있는 와중에 만력제는 [[태창제|맏아들 주상락]]의 아들 천계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계제는 만력제가 죽고 [[태창제]]가 황태자로 봉하는 16세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에 가까웠다'''. 결국 천계제의 교육수준이 이 정도가 된 이유는 결국 [[만악의 근원]] 만력제이다. 괜히 명나라는 만력제 때 망했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다만 아무리 정치와 학문에 관심이 없고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았다 해도 차기 황제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한 인물이 글을 모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명나라 황실에서 황태자가 되는 천계제한테 신경을 안쓸리가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지적장애]]가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뛰어난 목공예 재능과 집착을 보면 [[서번트 증후군]]이 의심되기도 한다.] 게다가 아버지 [[태창제]]는 재위 29일 만에 죽고 말아 천계제는 정말 졸지에 황제가 되었다. 그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인지 나중에 [[숭정제]]가 되는 5살 어린 [[동생]] 주유검을 아끼며 자식처럼 잘 대해주었고 동생의 교육에는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숭정제와의 우애가 매우 깊었다. 죽으면서 "너는 나보다 재능이 많으니 나라를 잘 다스릴 거다."라고 숭정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뭐, 보는 눈이야 있었지만, 숭정제가 땜빵해 보려고 하기엔 이미 억만 년이나 늦어버린 상황이라 명나라는 숭정제 대에서 멸망했다. 그의 정비 장 황후는 항상 환관의 횡포를 견제한 덕에 숭정제 때 효애철황후라는 명칭을 받고 무사하게 지냈고 [[이자성의 난]] 때도 끌려나가지 않고 오히려 보호되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결국 자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