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척부인 (문단 편집) === 비극의 시작 === 기원전 195년에 고제가 승하하자 장안은 여후의 세상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바로 척부인와 유여의 모자에게 있어 비극의 시작이었다. >'''아들은 왕인데 어미는 죄인이라네!''' >'''하루종일 [[쌀]]을 찧으면, 죽는 것과 다를 바 없구나!''' >'''서로 삼천리나 떨어져있는데 누가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子爲王,母爲虜! >終日舂,薄暮常與死相伍! >相離三千里,誰當使告汝! >(하략) >---- >영항가(永巷歌)의 앞 부분. 한서(漢書) 97상 외척전 67상에서 발췌. 고제가 죽고 [[여후]]의 아들인 [[혜제(전한)|혜제]]가 즉위하자 원래대로라면 조나라에 가야 했을 척부인은 조나라에 가지 못하고[* 반면 같은 유방의 후궁인 [[고황후 박씨|박희]](박부인, 효문태후 박씨)는 아들 [[문제(전한)|유항]]이 대왕으로 부임한 대나라로 멀쩡히 갔다. 이는 박희가 유방의 총애를 받지 못해 권력의 중심이 되지 않았고, 이 결과로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지 않아 여후가 그녀를 숙청할 이유를 못느꼈기 때문이다.] 여후의 명으로 태형을 받은 뒤, 머리가 깎이고 붉은 옷을 입어 죄를 지은 [[궁녀]]들이 가는 영항(永巷)에 감금되어 쌀을 찧는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자 척부인은 상기된 <영항가(永巷歌)>를 지어 노래하며, 마치 자신의 아들 유여의가 왕으로 있는 조나라에게 전해달라는 듯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던 여후는 이런 척부인의 행동을 도발로 받아들여[* 한서에서 여후가 "네 년이 제 아들에게 기대어 살아남으려고 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척부인만큼은 다른 정적들과는 달리 절대 곱게 죽이지 않기로 했다. 우선 여후는 척부인의 마지막 희망이자 방패막인 조왕 유여의를 죽이기 위해, 그에게 "장안으로 오라"는 송환 명령을 계속해서 내렸다. 하지만 유여의를 보필하던 [[주창(전한)|주창]]이 병을 핑계로 소환을 거부하자, 여후는 주창부터 소환해[* 이때 주창은 유여의를 보호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하긴커녕, 여후에게 질책만 당한 것 이외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는 주창이 과거 고제가 태자를 유여의로 교체하려는 논란이 일어날 때 혜제의 태자 폐위를 강하게 반대한 인물이고, 그 여후도 주창에게 무릎을 꿇고 감사 표현을 했을 만큼 여후와 혜제 모자를 보호했기 때문인 듯하다.(출처는 사기 열전) 실제로 주창은 기원전 192년에 사직한 후 자연사한다.], 유여의의 보호기반을 없애고 다시 명령을 내려 기어코 유여의를 장안으로 송환하는데 성공한다. 친모의 음모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던 혜제는 이를 막기 위해 매일같이 유여의의 곁에 붙어다니며 그를 보호하려 노력했지만, 기원전 195년 12월 혜제가 잠시 사냥을 하러 간 사이 여후는 유여의를 독살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유여의의 나이는 고작 12살이었다. 유여의가 어려서 일찍 일어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으며, 혜제가 유여의를 보호한 기간도 1달이 채 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태후본기 및 일부 기록에는 유여의의 사망일자를 기원전 194년 12월로 기록했는데 오기로 추정된다. 만일 유여의의 사망년도가 기원전 194년이면 척부인의 사망년도도 기원전 193년이 되어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