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척부인 (문단 편집) == 기타 == * 뒷간에서 죽었다는 최후로 인해 중국에는 척부인을 화장실의 수호신(원문은 厕神)으로 모시는 민간 신앙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 미모도 뛰어났지만 각종 가무에 능했고 특히 조나라의 대표 문화인 "소매를 치켜들고 허리를 꺾는 춤(翹袖折腰之舞)"을 잘 추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취미가 맞았고 당시 심신이 지쳤던 유방이 척부인을 유달리 총애한 것이라고 한다. * 야사에는 여후의 잔인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돼지로 만들 때 척부인의 음부를 짓이겼다니, 집행하기 전 남자 죄수들이 갇힌 감옥에 내던져 [[윤간|능욕당하게 했다니]], 유여의의 시체를 척부인에게 보여준 뒤 인간돼지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지만 인간돼지 사건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야사니 걸러보도록 하자. * 사람돼지 일화는 척부인이 유명해서 그렇지 후일 당나라의 [[폐후 왕씨(당고종)|왕황후]]와 [[숙비 소씨|소숙비]]도 [[측천무후]]에게 숙청당할 때 인간돼지형을 받고 죽었다는 야사가 존재한다. 다만 이쪽은 사지만 잘리고 죽은 뒤 술이 담겨진 항아리에 담겨지는걸로 끝났던지라 완전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 최후를 맞이한 척부인과는 비교가 안 된다. * 전한 문제-경제 시절의 정치가인 [[원앙(전한)|원앙]]은 척부인의 사례를 들어서 문제를 비판한 적이 있다. 문제가 총애하는 후궁인 신부인(愼夫人)과 함께 상림원(上林苑)에 행차해서 정해진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원앙은 일부러 신부인의 좌석을 [[효문황후]]의 것보다 뒤로 끌어내어 신부인을 황후보다 낮게 대우했다. 당연히 신부인과 문제는 크게 화를 내고 그대로 궁으로 돌아갔다. 원앙은 이에 대해 "첩과 정부인은 같은 격에 둘 수는 없습니다. 첩을 그렇게 총애하신다면 후하게 선물을 내리십시오. '''폐하께서는 사람돼지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말했다. 즉 함부로 첩을 황후와 똑같이 대했다간 애꿎은 첩만 피를 보고 나중에는 척부인 꼴이 날 수 있다고 경고한 것. 이에 정신이 번쩍 든 문제는[* 문제 입장에서는 남의 일이나 먼 옛날 일도 아닌게 문제는 '''한고제 유방의 아들'''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척부인이 죽을 때 문제는 11살이었다. 원앙 말대로 사람돼지 이야기를 단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이야기로서 들어봤을 사람이라는 것. 그나마 본인과 본인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별 총애를 얻지 못해서 무사할 수 있었지 척부인 못지않은 총애를 받았다면 최소한 목숨은 보전 못했을 것이다.] 이 원앙의 말을 신부인에게 전해 줬고, 신부인도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바꿔서 원앙에게 감사를 표하며 황금 50근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 [[조선]] [[선조(조선)|선조]]의 제1계비 [[인목왕후]]와 흥미로운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둘다 자신의 권력 기반과 배경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무리하게 시도하다가 정적[* 척부인 - 여후, 인목왕후 - [[광해군]]]에게 원한을 사 아들이 살해당하고[*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는 유방 사후 여후에 의해 독살,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은 역모에 휘말려 폐서인이 되고 유배지에서 의문사. 거기에 둘다 어린 나이(유여의 - 12세, 영창대군 - 8세)에 죽었다는 유사점이 있다.], 본인들도 비극을 맞이하여[* 인목왕후는 광해군의 보복으로 왕대비 자리에서 폐위되어 딸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유폐, 척부인이 여후의 보복으로 받은 형벌은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세간의 동정을 받고, 정적들은 이런 지나친 보복 때문에 후대에도 비판을 받았다는 점, 그러나 단순히 동정의 대상으로 보기에는 본인들에게도 무모한 권력욕 및 잘못된 처신, 처세술의 부족과 같은 큰 실책이 있었음을 함께 지적받는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심지어 이들이 보인 무모한 권력욕의 배후에는 군주인 남편(교체될 세자의 아버지, 즉 한고제 유방과 조선 선조)의 정국 장악력 확보 시도가 있었다는 점이나, 처음에는 정말 세자 교체가 가능하리라 착각한 것인지 들떠서 선을 넘는 행보를 보였지만 현실권력의 문제로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이후에는 더이상 직접적인 저항은 하지 않았고 (또는 애초부터 할 수도 없었고) 순순히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가혹한 보복을 당했기에 이것이 지나친 일로 여겨져 본인이 받는 동정과 정적이 받는 비판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인목왕후와 척부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는데, 인목황후는 선조의 정비인데 비해 척부인은 어디까지나 일개 후궁의 신분이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유방 사후 여후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최후를 피할 수 없던 척부인에 비해 인목왕후는 그저 폐서인 및 감금되는 것에 그쳤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이런 조치마저도 '''폐모'''살제라 하여 광해군의 정당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광해군이 폐위된 후 인목왕후는 [[소성대비]]로 복권되어 막강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사실 인조 즉위 후 그녀의 행적을 보면 여전히 부족한 정치적 통찰력으로 여러 실책을 거듭 저지른 탓에 그에 대한 평가는 현대까지도 여전히 좋지 않지만 어쨌건 그녀가 주는 정통성에 의존해야 했던 [[인조]]로써는 참고 저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말하자면 왕조국가에서 정식 왕비(황후)가 가지는 권위란 이정도로 강력한 것이니, 그 권위를 가지지 못한 후궁으로써 황후+적장자의 생모+즉위(개국) 이전부터 유방을 내조해온 조강지처+자기 자신의 상당한 정치적 기량+나름 명문가에 속하는 출신 가문이라는 끝판왕급으로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여후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거스를 생각을 했던 척부인이 얼마나 무모했는가, 또는 얼마나 세상물정을 몰랐는가를 보여주는 근거로써는 아주 유용할 것이다. * 또 다른 조선시대의 사례를 보면, 건국 초기, 개국군주의 배우자(왕비)로써 왕을 설득하여 자신의 친자를 후계자로 책봉하도록 밀어붙였다는 점, 그리고 이로 인해 정적인 다른 왕자들의 역습을 받아 자식이 살해당하고, 본인까지 사후 모욕을 당했다는 점에서 [[태조(조선)|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사례와 비교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신덕왕후 강씨는 당시 고려의 유력자들의 편법적 중혼 관습, 즉 향처와 경처를 따로 두는 관습에 따라 중앙의 유력 귀족 집안 출신으로 이성계와 결혼하여 정치적 파트너 역할을 해 온 인물이었고, 또 이성계와 먼저 결혼한 향처였던 훗날의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한 덕도 보아 조선 건국 이후 한씨를 '절비'라는 애매한 지위로 밀어내고 유일한 왕비, 즉 조선 최초의 왕비 지위에 오르는데 성공한 인물이었다. 즉 일반적인 결혼의 논리(특히 처첩제의 논리)에서는 먼저 결혼한 부인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 당연시되지만 '개국군주의 특수성'을 보면 즉위 이전에 여러 부인이 있었던 경우, 남편이 즉위하고 정식으로 왕비의 지위에 세워진 이가 가장 정통이 아니냐고 말할 여지가 생긴다는 것. 이 논리에 더해 [[정도전]]등 신권정치를 지향하는 [[신진사대부]] 세력과도 손을 잡고 결국 [[이방석]]을 조선 최초의 세자 자리에 책봉하는 데까지 성공하였으니, 정치력 대결의 차원에서는 사실상 신덕왕후 강씨가 일단 완승을 거뒀던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의 이 승리는 신덕왕후 사후 [[이방원]]등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에 의해 [[1차 왕자의 난|군사적 차원에서 이뤄진 반격]]으로 무너졌고, 군사적 승리로 집권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이방과]]→[[이방원]])이 이후 생모 한씨를 정식으로 왕비(신의왕후)로 추존하고 신덕왕후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우고 능을 이전하여 공식적인 지위는 바꾸지 않되 사실상 후궁에 준하는 처우로 대하게 하는 등 강씨가 거뒀던 승리의 결과를 무위로 돌림으로써 자신들의 정통성과 권위를 강화하고 정적에게 보복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례는 거의 유사점을 찾기 어렵다. 주요 인물간 구도를 비교하자면 <여후-척부인/유영-유여의>:<신의왕후-신덕왕후/이방원-이방석>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인데, 이렇게 두고 비교해보면 각 인물들의 입장이나 특징, 행적등이 무엇 하나 유사하다고 말하기 어려움을 쉽게 알 수 있는 것. 게다가 주된 갈등 전개 역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무지함과 무모한 권력욕'과 '그에 대한 과도하게 잔인한 보복'이 주된 논란거리인 척부인 사건에 비해 왕자의 난으로 끝난 조선 초기 왕위 계승 분쟁은 상당히 팽팽한 권력 다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막내를 무리하게 태자로 내세운 것이 신덕왕후측의 중요한 패착, 즉 정치적 무리수로 평가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자 책봉까지 얻어내는데 성공했으니 척부인 사건이나 자주 그 비교대상으로 제시되는 인목왕후-영창대군 사건등에 비하면 이것만으로도 이미 이방원 등 신의왕후계에게 상당히 유효한 공세를 가하는데는 성공했던 것이다. 심지어 신덕왕후의 이름 죽음이라는 악재만 없었다면 좀 더 팽팽한 대결이 이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 말하자면 개국 직후 창업군주의 자식대에서 벌어진 계승권 다툼이라는 상황의 큰 틀은 유사 사례로 꼽을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별 공통점이 없다. 굳이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강력한 권위를 가진 개국군주가 개인적인 감정, 또는 정국 장악력 강화를 목적으로 이미 장성한 큰 아들이 아닌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시도한 사례라는 점이나 군주와 친밀한 관계인 왕비, 또는 후궁은 계승구도를 비롯한 정치적 국면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써 비교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건 이 사례와 비교해보더라도 척부인은 참 무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