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처용 (문단 편집) == 개요 == [youtube(yXFAo03e-8c)] '''處容'''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실려 있는 [[신라]] [[헌강왕]] 때의 인물. 나라가 태평을 누리자 [[왕]]이 재위 5년([[879년]])에 [[특이한 지명/대한민국#s-2.4.3|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광역시]] [[남구(울산)]] 황성동과 [[울주군]] [[온산읍]] 사이의 외황강 하류. 그래서 온산읍 쪽 지명도 '처용리'이다. 구 동해남부선 선암역이 이 일대에 있었는데 [[동해선 광역전철]]이 개업하면서 [[개운포역]]으로 이름을 바꿔 개업했다.]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면서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졌다. 갑작스런 변괴에 왕이 놀라 좌중에 물어보니 일관이 말하되 “이것은 동해 [[용]]의 짓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용을 위하여 절을 짓도록[* 이 절은 망해사(望海寺)라고 해서 지금도 울산 [[울주군]] [[청량읍]] 울주군청 뒤에 남아 있다. 현존하는 건물들은 모두 1960년대에 다시 지은 것이고 신라 망해사 당시의 흔적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된 [[승탑]]만 남아 있다.[[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40|*]] ] 명한 즉, 바로 어두운 구름은 걷히고[* 이로부터 이 곳을 '구름이 걷힌 포구', 즉 '개운포'라고 했다.] 왕의 절 건축에 기분이 좋아진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그 중 하나가 왕을 따라오니 곧 그가 처용이었다.[* 동해 용왕과 일곱 아들들이 등장한 장소로 전해지는 [[처용암]]이라는 작은 암초가 있는데, 외황강 하류에 위치한다.] >헌강왕 5년(879년) 3월에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巡幸)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다. 생김새가 해괴하고 옷차림과 두건이 괴상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일컬었다. <고기에 이르기를 『왕의 즉위 원년(875년)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헌강왕 5년(879년)에 신라의 수도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御駕) 앞에서 가무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삼국유사와 미묘하게 다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이야기의 '해괴한 사람들'이 처용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근거로 처용은 저 무리 중 한 명이고 역신은 헌강왕이라고 하는 해석도 있다.] 왕을 따라온 처용은 달밤이면 거리에 나와 가무(歌舞)를 하였다고 하며 왕은 그를 미녀와 짝지어 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처용가]]를 불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