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사시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중국 창사 1.jpg]] 14세기에 세워진 이래로 창사의 상징이던 천심각 (天心閣)과 성벽. 현 누각은 [[중일전쟁]] 당시 파괴된 후 1984년 복원된 것이다. 중간에 담주라고 한번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고대 (춘추전국시대)의 이름이 현대까지 계속 내려오는 몇 안되는 중국 도시이다. 본래 원래는 묘족의 땅이었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초나라 땅이었다. [[진(영성)|진나라]]가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를 멸하고서, 군국제를 실시하면서 초나라의 강남 지역을 떼어내 장사군을 세웠다. 이것이 지명으로서 장사의 기원이다. 이후 [[한나라]]에서 장사국을 제후국으로 두었으며, 장사군에서 영릉군과 계양군을 분할했다. 이후에도 장사군을 계속 분할하여 장사군의 직할지는 계속 축소되었다. 장사군은 둥팅 호 이남 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고, 이 지역에 설치되는 상주 등 군의 상급 기관의 관청 소재지(치소)가 있었다. [[삼국지]]에서는 [[형주]] 남부(형남) 4군(영릉, [[무릉]], [[계양]], 장사) 중 하나로, 은근히 주인이 자주 바뀐 흥망성쇠를 가진 성이다.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던 시기에는 [[손견]]이 다스리고 있었고 손견이 [[황조]]에 의해 [[암살]]당한 후에는 [[장선(장사태수)|장선]] 등의 태수들을 거쳤고, 이어 [[한현]]이 다스렸다가 한현이 [[유비]]에게 항복한 이후에는 [[촉한]]의 땅이였다가 [[익양대치]]로 인하여 오나라의 땅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옛 주인을 다시 찾아간 셈이다. 어쨌든 [[삼국지연의]]만 봐도 손견, [[황충]], [[위연]][* 이쪽은 [[여남]] 출신이지만 어째튼 연의에서나마 여기서 황충을 구한 셈이니 포함시킨다.] 등 굵직한 무장들이 여기를 근거로 활약했다. [[수나라]]에서 군을 폐하고 주로 대신하면서는 담주(潭州)를 설치하고 장사현 · 익양현 · 형산현 · 소양현 등을 두었다. 담성(潭城)이라고 부르다가 [[명나라]] 홍무제 시절 담주부를 장사부로 개칭하면서 "장사"라는 이름을 회복했다. 이후 750~1100년까지 장사는 중요한 상업 도시로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청 왕조 하에 1664년부터 후난성의 성도이자 주요한 미곡 시장이었다. 도시는 1852년 [[태평천국 운동]] 때 포위당했으나 후난성 출신 의병들의 활약으로 함락되지 않았다.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마오쩌둥]]이 처음으로 봉기한 장소이기도 하다. 1927년 9월 마오쩌둥은 [[추수폭동]]을 기획했다가 참패하고 후난성 남부의 징강산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폈다. 마찬가지로 [[펑더화이]]도 1931년에 [[창사 폭동]]으로 창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지만 이후 국민당군에게 참패하고 물러난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중일전쟁]]의 주요 전장으로 잠시 일본군에 점령되기도 했다. 1938년 10월 우한을 점령한 일본군이 서진하자 [[장제스]]는 일본군에게 밀릴 경우 창사 시내의 모든 건물을 파괴하여 적에게 넘겨주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11월 중순에 시행되어 천심각을 포함한 유서깊은 건물들 전부가 중국군의 손에 전소되었다. 국공내전때 이곳을 지배하던 국민당 군벌들은 대세가 공산군에게 기울자 모두 동향인 마오쩌둥에게 투항했고, 공산군은 1949년 5월 창사시에 무혈입성했다. 1949년 이래로 재건되어 도시는 현재 주요한 항구이자 상업 공업 중심지이다. 지금은 창사 시의 메이시(Meixi) 호수를 주변으로 신도시 건설이 활발히 진행되는 등,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