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경궁 (문단 편집) ==== 고의적인 훼손 ==== 본궁이 아니라 하더라도 창경궁은 엄연한 궁궐이고, 또한 단순한 지방의 행궁이 아닌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로서 중요한 행정적 역할을 하던 곳이다. 왕조와 왕가에 있어서 궁궐이라는 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궁궐이 왕가에게 가지는 의미를 모르고 유원지로 개조할 생각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토공은 궁중의 숙청을 단행함과 함께 한편으로는 (중략) 왕자의 은혜를 백성들이 우러러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궁전의 영조와 창경궁에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의 신설을 진언했다(중략)” >---- >곤도 시로스케, 이왕궁 비사에서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경성도시계획 공원표'를 보면, 일제는 창경궁 외에도 대한제국의 궁궐들을 각각 경복원, 창덕원, 덕수원으로 변경하여 대중에게 공개할 의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심지에서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편이 즉각적으로 공원을 조성시킬 수 있고, 또 상징적 의미가 있는 궁궐을 유원지화시키고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기존 질서를 부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해외에 [[일본 제국|일본]]이 대한제국 왕가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순종(대한제국)|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과 위와 같은 실제 의도들로 인해 창경궁의 개조를 단행한 것으며, 순종이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러한 의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일본 정부는 도쿠가와 가문의 사찰인 간에이지가 [[보신 전쟁]] 와중에 불타고 남은 자리에 우에노 공원을 조성하였던 바 있다.] 근대건축도면집에 실린 1907년 창경궁 도면을 보면, 일본은 건물 몇 개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창경궁 전부를 공원으로 개조할 생각이었고, 왕실의 개인 정원으로 둘 생각도 없었다. 1909년 11월 창경궁에 박물관까지 완공을 하자마자 창경궁을 일반 대중에 공개해버렸고, 조선총독부는 거듭할수록 기존의 전각들을 허물고 일본식으로 개조하며 '궁궐의 유원지화'를 심화시켰으며 더욱이 순종이 명시적으로 반대한 부분들(창경궁과 종묘의 연결로 파괴 등)에 대해서도 개조를 강행하는 등 애초부터 창경궁의 개조는 순종의 의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순종은 어느 정도 창경궁에 식물관과 동물원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꼭두각시 황제인 순종 입장에서는 반대를 하기도 어렵거니와 궁궐에 무료로 박물관과 식물원, 동물원을 지어주겠다는데 딱히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순수한 순종 본인만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훗날의 창경궁 복원을 나쁘게만 보기는 힘들지만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