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경궁 (문단 편집) === 조선 시대 === 1418년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조선)|태종]]이 [[세종대왕|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으로 거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당시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만수무강과 평안을 바란다는 뜻[* 그런데 정작 태종은 이 이름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자세한 건 [[태종(조선)|태종]] 항목 참고.]이다. 태종의 후궁들은 태종 사후인 세종 대에도 여전히 수강궁에 거처하였으며, [[단종(조선)|단종]] 역시 [[문종(조선)|문종]]이 경복궁에서 죽은 이후 누이인 경혜공주의 집으로 옮기기 이전까지 잠시 수강궁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단종이 경혜공주의 집을 시어소로 삼아 거처할 당시 수강궁이나 경복궁으로 환어하자는 신하들의 상소에 대하여 "수강궁은 싫고 장차 경복궁으로 돌아가겠다"고 답한 적이 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후 [[세조(조선)|세조]] 대에는 단종의 영월 유배 후 비어있었으나, 세조는 죽기 며칠 전 수강궁으로 이동해 며칠 후 사망했고, [[예종(조선)|예종]]도 수강궁에서 즉위했다.[* 이후 예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어머니인 [[정희왕후|자성대비]]도 같이 갔다. 조카인 [[성종(조선)|성종]]은 경복궁 즉위 직후 창덕궁으로 이어했으며, 이 때 자성왕대비, 인수대비 및 인혜대비 역시 함께 했다.] 성종 10년(1479) 수렴청정 중단 후 자성왕대비가 스스로 인수대비와 함께 수강궁으로 이어했는데, '''[[성종(조선)|성종]]'''이 세조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자성왕대비, 생모이자 대비인 인수대비, 제8대 [[예종(조선)|예종]]의 계비인 숙모 인혜대비를 모시기 위해 1483년~1484년 사이 대대적으로 궁역을 확장해,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의 '창경(昌慶)'으로 이름을 고쳐지었다. 다만 자성왕대비는 [[온양행궁]]에서 중간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창경궁의 완성은 보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창경궁의 대대적인 보수 및 확장은 [[폐비 윤씨]]가 사사된 1482년 말부터 논의되어 다음 해부터 진행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도 그렇거니와 당대에는 더욱 크게 느껴졌을 두 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었을지는 생각해볼 만하다. 뿐만 아니라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와 왕대비인 소혜왕후가 수강궁으로 이어하였다는 기록이 성종 10년 5월 29일의 기사로, 중궁을 폐출한다는 교서가 내려졌다는 기록이 같은 해 6월 2일의 기사로 각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난 후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전소되었다.[* 흔히 임진왜란의 혼란 도중 모든 궁궐이 소실된 것으로 알려지나, 선조 때와 인조 때의 실록기록에는 창경궁의 건물 중 "양화당"과 자그마한 별당만 남았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왜군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설, 선조의 몽진 후 한양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민중들에 의해 방화된 것 아닌가 하는 설이 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본군 종군승의 일기 기록에 왕궁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이는 선조가 대피한 후 왜군이 한양에 입성할 때까지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반면 종묘의 경우 왜군에 의해 불에 탄것이 확실하며, 민중이 불태웠다는 기록은 풍문이 그렇다더라 정도이기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광해군]] 7년 때 중건되었다.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게 되면서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 비해 쓰임새가 대폭 커져 여러 사건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이 불 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창경궁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이 완전히 전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난리통에도 [[창경궁 명정전|명정전]], [[창경궁 문정전|문정전]], 여휘당, [[창경궁 환취정|환취정]] 등 일부 전각이 살아남았기에 인조 11년 인정전 하나만 남아있던 창덕궁보다 먼저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창경궁은 비교적 화재 사고가 잦았다. 제19대 [[숙종(조선)|숙종]] 때는 [[장희빈]]이 [[창경궁 통명전]]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제21대 [[영조]] 때는 휘령전(문정전) 앞마당에서 [[정조(조선)|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쌀담는 뒤주 속에 갇혀서 8일 만에 [[임오화변|요절한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제22대 [[정조(조선)|정조]]가 1800년 6월 [[창경궁 영춘헌|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