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갑 (문단 편집) ==== 서양 ==== ||[[파일:external/www.usna.edu/Hoplites.jpg]] || || 그리스 고전기의 [[호플리테스]]가 그려진 회화 || [[미케네 문명]]에서는 데드라 515호묘 출토품으로 멧돼지 어금니 투구(Boar's Tusk Helmet)가 확인된다.[* [[일리아스]]에 이에 대해 '안쪽은 수많은 가죽끈으로 빳빳하게 펴져있고 바깥에는 번쩍이는 엄니를 가진 돼지의 흰 이빨들이 훌륭하고도 솜씨있게 양쪽에 촘촘히 박혀 있다'는 묘사가 존재한다. 이 투구는 아우톨뤼코스가 아뮌토르의 궁전에서 훔친 것으로, 암피다마스, 몰로스, 메리오네스를 거쳐, 트로이 전쟁에서 아우톨뤼코스의 외손자이기도 한 [[오디세우스]]가 쓰게 된다. (천병희 역 일리아스 10권 262행부터) ] 역시 나무 또는 가죽으로 만든 틀 위에 뼛조각을 대고 꿰메어서 고정시킨다는 가장 초보적인 찰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런 양식의 투구는 그리스 암흑기 이후 맥이 끊기고 코린트식 투구와 파노플리아 갑옷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하지만 철보다 비중이 높은 청동이 사용되었고, 당시 야금술이 부족한 점에 따라, 무거운 청동 흉갑의 재질은 두터운 리넨으로 대체되었다. 대신에 리넨으로 만든 흉갑의 배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찰갑을 두르기도 했으며, 이밖에도 찰갑은 리넨 갑옷과 다양하게 복합되어 쓰였다. ||[[파일:external/pds20.egloos.com/c0063102_4d7a07fc78bf0.jpg|width=540px]]|| || 10~11세기 [[러시아군]] ||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러한 중동 풍토의 영향을 크게 받아 보병부터 기병에 이르기까지 전 병력이 클리바니온(klibanion)이라는 찰갑으로 무장했다. [[사르마티아]]나 [[스키타이]]와 같은 기마 민족은 대중적으로 찰갑을 사용하였다. [[사산 왕조]]와 [[파르티아]]가 운용한 중장기병들도 몸통이나 스커트는 찰갑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중동국가들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로리카]] 스쿠아마타(Lorica squamata)라는 갑옷이 존재했다. 로리카 스쿠아마타는 [[프랑크 왕국]]의 갑옷에 영향을 주었으며, 훗날 [[바이킹]] 중에서도 러시아 등으로 진출하는 [[스웨덴]]의 바이킹들은 찰갑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다.[* 엄밀히 말해 로리카 스쿠아마타는 찰갑이라기보다는 [[어린갑]]이다.] 이들의 찰갑은 바이킹 이후 가난했던 현지 사정 탓에 대대로 전수되어 1361년 [[비스뷔 전투]]의 전사자 집단매장지 발굴에서는 당시 년도에서 기본 수백년 전의 구식 찰갑이 대량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바이킹]]들은 쇄자갑으로 유명하지만 찰갑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며 특히 러시아 지역으로 진출했던 스웨덴 바이킹들이 애용했다. 훗날 1361년 스웨덴 고틀랜드에서 발발한 비스뷔 전투의 집단매장지에서는 대규모의 찰갑과 코트 오브 플레이트가 발견되었으며 출토된 찰갑들은 대부분 1361년 기준으로도 수백년전의 양식들이었으며, 궁핍했던 당시 스웨덴 주민들이 바이킹 시대부터 대대로 물려입은 갑옷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바이킹이 노르망디 지방에 진출해 세운 [[노르망디 공국]]에서도 일부 찰갑이 사용되었으나, 곧 사장되고 쇄자갑이 주류 갑옷으로 나오게 된다. 이후 서유럽에서는 찰갑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