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갑 (문단 편집) ==== 한국 ==== || ||<:>[[파일:attachment/찰갑/Example2.jpg|width=100%]] ||<:>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400_128014333283541.jpg|width=100%]] || ||<:><-2> '''무산 범의구석 출토 골제 찰갑''' ||<:> '''경주 죽막동 출토 청동 단추''' || 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찰갑은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의 제40호 집자리에서 출토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골제 찰갑 유물이다. 구멍에 사용으로 인해 마연된 흔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다른 찰갑들과 마찬가지로 가죽이나 천 위에 갑찰을 대고 꿰매거나 초보적인 혁철법으로 엮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천 어은동이나 경주 죽동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단추를 옷에 붙여서 갑찰처럼 사용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중국 상주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단추도 그렇게 용도를 추정하는 바가 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찰갑을 사용하였으나 한국 남부에서는 찰갑은 잘 사용되지 않았으며. [[가야]]와 [[일본]]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가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여 가야군과 일본군을 괴멸시킨 이후에는 남부에서도 찰갑을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후 고구려에서 한반도 남부와 나아가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신라, 가야는 고구려의 것을 쫒아 찰갑으로 완전히 개량하였다. 이를 일본에서는 괘갑(挂甲)이라고 한다. ||<:> [[파일:external/www.nkplf.com/69.jpg]] || || ||<:>[[파일:external/pds24.egloos.com/b0058018_4f1438fd78836.jpg|height=430]]||<:>[[파일:external/image.edaily.co.kr/PS13042500350.jpg|height=430]]||<:>[[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21398_STD.jpg|height=430]]|| ||<-2> 고구려의 찰갑[* 그러나 이 복원품은 1993년 자료가 부족하던 시절에 만들어 [[http://kyb0417.egloos.com/v/5075203|고증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갑찰의 방향이 반대인데다, 투구도 후대의 것이며 대퇴/하퇴갑을 다리 둘레로 감싸는 것도 잘못됐다.] || 신라의 찰갑 || 가야의 찰갑 || 이 당시 찰갑을 복원할 때 '고구려 벽화'를 참조해서 좌측 갑옷마냥 바지 형태로 소찰을 일렬로 늘여놓아 다리를 감싸 하반신 갑옷을 만들곤 하는데 그런 형태라면 '''상식적으로''' 유연성이 떨어지고 무게가 무거워 거동이 불편하고, 말에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리만큼 힘들어진다.[* 물론, 유럽 등지에서도 다리나 팔을 전체적으로 덮는 갑옷 자체는 존재하고 있지만, 최소한 기병용 갑옷의 경우 다리를 구부리는 것을 방해하는 형태로 만들지는 않는다.] 말을 타야 하는 만큼 최소한 가랑이 안쪽까지 찰갑편을 댔을 가능성은 없다. 이를 볼 때 고구려 갑옷의 하반신 부분은 바지라기보다는 치마 형태의 갑상(甲裳)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 사진 오른쪽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재현한 가야 찰갑은 포형 갑옷에 다리는 허벅지와 종아리에 경계를 주어 허벅지를 가리는 갑상 형태의 대퇴갑을 장비하고 종아리 부분은 토시처럼 전체를 감싸는 하퇴갑 형태로 재현되었다. 중국의 찰갑이나 몽고, 티베트 등 해외 기마민족들의 찰갑과 비교해볼 때 실제 삼국시대 찰갑의 다리 보호구 역시 두 부위로 나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파일:external/pds22.egloos.com/c0063102_4d7a07ffbe54b.jpg|width=540]]|| 갑찰이 앞으로 나오는 방향이 위쪽이냐 아래쪽이냐에 따라 외중식과 내중식으로 나뉘는데, 외중식은 아래쪽 갑찰이 앞으로 나오고, 내중식은 위쪽 갑찰이 앞으로 나온다.([[http://blog.naver.com/zolaman_k/60054078621|참조]]) 기마병이 찰갑을 사용할 때에는 외중식 찰갑을 입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아래쪽에서 창칼 등이 찔러들어올 경우 내중식은 날이 그대로 파고들어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에서 사용된 찰갑은 모두 외중식이다. 고구려(북방)계 [[찰갑]]은 부품수가 많고 관리가 힘들었지만, '''다층구조에 의한 충격 완화 효과로 화살에 대한 방어력이 남부식 [[판갑]]에 비해 높았다.''' 판갑의 경우 금속판 하나로 화살을 방어해내야 했지만 찰갑의 경우 몇겹으로 겹쳐진 철편, 그리고 가죽으로 충격을 분산 흡수한다. ([[https://shyne911.tistory.com/m/1445|참조 영상]]) 영상을 보면 판갑은 뚫렸지만, 찰갑은 화살을 일정 수준 방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두정갑]]도 유사한 이유로 단갑보다 방어력이 높은데, [[https://youtu.be/rAIqOtw1j7o?t=1491|영상]]에서 화살이 철판 한장은 뚫었지만 같은 철판으로 만든 두정갑은 뚫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찰갑이 화살을 막아냈을 때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충격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타박상이나 골절 문제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판단하는 것이 좋다.] 제철 규모가 현대에 비해 극히 작고 기술력이 떨어져 그 품질 균일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4~5세기경의 철판과 철편으로 만든 판갑과 찰갑이라면 더욱 심한 차이가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찰갑의 방호력에 대한 실험이 아래 글이 지적하듯 실제 전투 상황의 장거리 사격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지의 여부를 반영하지 못한 것은 [[옥에 티]]이다. 화살의 운동에너지는 강궁이라도 [[활#s-1.3.1|약 180J 정도이며]][* 현대 무기와 비교하자면 보통 권총에 쓰이는 [[파라벨럼]] 탄이 약 500J 정도이고 소총탄은 4자릿수로 그보다 훨씬 높다.] 거리가 늘어나거나 곡사할 경우 더 떨어지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판갑으로 화살을 막았을 때와 찰갑으로 화살을 막았을 때 어느 수준의 방호가 가능한가의 여부는 불명확한 만큼 찰갑이 모든 상황에서 우월하다거나 판갑이 아예 못쓸 물건이라고 보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디펜스 코리아]][* 디펜스 코리아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원문 출처 링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신재호(군사평론가)|신재호]]의 기고문에서는 해당 실험이 지닌 한계에 대해 지적했다. 아래는 그 일부. 아래 사진은 KBS 역사 스페셜에서 2000년 1월22일 방송한 실험 장면으로 복원한 고구려 화살촉이 가야 판갑(板甲, 일명 단갑)을 관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용한 화살촉은 뾰족한 화살촉이다. 서울 구의동에서 출토된 '''고구려 화살촉의 강도(탄소량 평균 0.51%)를 참조'''하여, 이에 준하는 초강을 사용하여 화살촉을 제조했다. 판갑은 가야 갑옷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야에서만 사용한 갑옷은 아니며 이른 시기의 신라나 백제에서도 사용한 갑옷이다. 또한, 백제나 가야의 원군, 용병, 혹은 동맹군 자격으로 한반도상에 출전했을지도 모르는 왜군들도 이러한 판갑을 주된 갑옷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아래 사진에 보이는 실험 결과는 삼국시대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상대했을 이름모를 판갑 전사(板甲 戰士)의 죽음을 재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실험은 개인은 추진하기가 어렵고, 언론사나 공영 연구기관 정도는 되어야 실험이 가능한데, 공영방송인 KBS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기병사격을 재연하기 위해 먼거리에서 사격하지 못하고, 가까운 거리 (5m 이내)에서 사격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원거리에서 국궁 기병사격을 잘하는 인물이 없다) '''실전적인 의미가 있는 거리 (50~70m 이상)에서도 관통할 수 있는지, 근거리라면 넓적한 화살촉도 판갑을 관통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았으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