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갑 (문단 편집) ==== 중국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erra_Cotta_Warriors,_Guardians_of_China%E2%80%99s_First_Emperor_1.jpg|width=600]] || ||<:> '''[[병마용]]에 묘사된 찰갑과 병마용 출토 석제 찰갑''' || [youtube(8JCWqsZoNtA)] 중국 찰갑의 화살에 대한 방어력에 대한 영상 중국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전국시대]]의 아수라장(...)을 거치면서 갑옷이 더욱 개량되어 갑찰이 더욱 작아지고, 엮는 방법도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상체는 내중식 혁결법, 하체와 상박은 외중식 수결법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적인데 이는 다리와 팔의 활동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렇게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당연히 대량생산은 어려워졌던 것으로 보이고, 때문에 진시황의 병마용에서는 갑찰을 천 위에 부착시키거나 리벳으로 고정시킨 듯한 표현이 다수 확인된다. 이러한 기본 양식은 한나라로 계승되었고 갑찰이 더욱 작아지고 얇아지는 경향도 지속되어, 전한대에는 상대적으로 긴 갑찰을 나란히 엮어서 상체를 방호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지만 후한대에는 위 사진과 같이 길이도 짧아져서 어린갑이라고도 하는 물고기 비늘 모양을 갖추게 된다. 투구도 이와 마찬가지로 갑찰을 엮어서 만들었다. 최근의 삼국지 드라마에 나오는 갑주의 묘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 [[파일:external/images.china.cn/0019b91ec944095453a907.jpg|width=100%]] ||<:> [[파일:attachment/찰갑/Example.jpg|width=100%]] || ||<:> '''병마용 출토 석제 소찰주''' ||<:> '''시안 외곽 한묘와 전한 제왕묘 출토 소찰주 재현''' ||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민족들의 중원 침투를 통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의 찰갑들이 고착화된다. 특히 기마병의 적극적인 운용으로 다리를 보호하는 갑상(甲裳)이 도입되고, 마갑까지 갖춘 [[카타프락토이#s-1.3|중장기병]]이 활약한 시기이기도 했다. 후한서 채옹열전에서 175년 시점에 유주와 기주에서 개마가 산출된다고 한 기록을 시작으로, 200년에는 [[관도대전]]에서 백 단위의 개마가 운용된 모습이 보인다. 물론 당시의 개마는 가슴가리개 형태의 초보적인 마갑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는 하지만, 이때의 영향은 [[고구려]]에까지 미쳐서 고구려 중장기병 편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