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이잉원/생애 (문단 편집) == 생애 초반 == [[1956년]] (민국 45년) [[8월 31일]]생. [[대만]]섬 남부의 [[핑둥]]현은 그녀의 [[본적]]지이고, 그녀의 저서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인생"에 따르면,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본적지가 [[핑둥]] 현이라 사람들의 오해가 있다고[* 대선 공고에도 출생지가 타이베이라고 되어 있다. 대선 공고에는 후보자의 출생지가 성급, 현급 행정구역까지 나온다. 본적지는 안 나온다. 대륙 출생자의 경우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이 아닌 중화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으로 나온다. 그래서 과거 [[롄잔]]은 '산시 성 시안 시'가 아니라 그냥 '시안 시'로 나왔고, [[쑹추위]]도 '후난 성 샹탄 시'가 아닌 '후난 성 샹탄 현'으로 나왔으며, [[쉬신잉]]은 '타이완 성 신주 시'로 나와 있다. 차이잉원은 그냥 '타이베이 시', [[마잉주]]는 '홍콩'으로 나와 있다. 타이완 성 타이베이 시가 아닌 그냥 타이베이 시로 나온 것으로 보아 출생 당시의 행정구역이 아닌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의외로 순수 [[본성인]]이 아니라 '''반산(半山)'''이다. 차이잉원의 저서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인생"에 따르면, 차이잉원의 증조부 때까지는 대만에 거주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만일치시기|일제강점기]]에 [[만주국]]에서 활동하다가 2차 대전 일본의 패망 이후 대만에 돌아와서 차이잉원을 낳았다고 한다. 부친이 [[객가인]]이며 할머니가 [[대만 원주민]](파이완 족)이라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IN201509010933000317761845189.jpg|width=100%]]}}}|| || '''고등학생 시절''' || 차이잉원의 부친은 자동차 수리업을 기반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부동산, 건설, 호텔업으로까지 사업 분야를 확장했다. --아니 도대체 수리점을 어떻게 운영했길래-- --하긴 한국에도 [[현대그룹|어느 불타서 망한 자동차 정비소]] [[정주영|사장]]이 있긴 하다-- 이복 자매 형제 포함해서 아홉 남매들 중 막내였는데, 부친이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녀들 중 누군가 법학을 전공하길 기대했다. 이를 배경으로 차이잉원은 역시 훗날 대만 총통 ~~선배들~~ 이 되는 [[천수이볜]]과 [[마잉주]]도 거쳐간, 최고 명문 [[대만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부친의 사업이 나름 성공한 편이어서 집안이 꽤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차이잉원이 교수가 된 후, 아버지가 못 보던 최고급 [[외제차]]를 끌고 오더니 "막내야, 이건 네 차다!"라며 선물했다고 하니 어지간히 잘살기는 했던 모양. 국민당 측에서는 이를 빌미로 차이잉원의 부친을 "일제 식민 통치 시절 특혜를 누린 친일파"로, 차이잉원은 "부모 잘 만나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이란 식으로 비난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물론 차이잉원 측은 "근거 없는 흑색 선전"이라고 반박했다. 오빠와 언니들은 다 결혼해서 분가했는데 차이잉원 본인은 미혼으로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이미 차이잉원이 정치에 발을 들일 때 쯤(행정원 부원장 시절) 세상을 떴다. 학부 졸업 이후에는 미국 [[코넬 대학교]] 법학 석사,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법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이 시절 중국어를 거의 사용을 하지 않아서 귀국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중국어를 어색해했다. [[2016년]] 현재도 마찬가지로 차이잉원의 [[표준중국어]]는 발음과 어순 모두 어색하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한때 총통 선거에서 대결했던 [[마잉주]] 전 총통에 비하면 유창함에서 꽤 차이가 난다.(이건 마잉주가 비[[관화]]권 출신임에도 표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탓이기도 하다. 중화민국 역대 총통 중 관화권 출신이 하나도 없다.) 마잉주 - 차이잉원 [[ECFA]] 토론을 봐도 차이가 좀 심한 편이다. 확실히 [[영국]] - [[미국]] 유학 생활을 하면서 중국어를 안 쓴게 잔재로 남은듯. --유학은 마잉주도 했는데--] 1984년 대만으로 돌아와 불과 27세 나이에(!!) [[국립정치대학]] 법학과 부교수로 임용되어 1991년까지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둥우 대학 국제 무역학과 대학원과 법학과에서 교수를, 1993년부터 2000년까지 국립 정치 대학 국제 무역학과 교수를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