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차오쿤 (문단 편집) === [[1차 직봉전쟁]]과 [[회선 사건]] === 이후 천하는 직예독군 겸 직노예순열사 차오쿤과 3사단장 우페이푸의 손에 있었다. 차오쿤의 동생 조예도 직예성장이 되었다. 하지만 각 지역에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환계의 여러 군벌들이 존재했고 [[장쭤린]]의 봉천군벌은 직계군벌의 독주를 불만스러워했다. 직계군벌은 직계군벌대로 마적단 출신 주제에 거들먹거리며 탐욕스럽게 전리품을 챙기는 장쭤린을 고깝게 보았으며 안직전쟁 이후 재출범한 [[진윈펑]] 내각이 봉천군벌에게 너무 편향적으로 군다고 생각했다. 장쭤린은 장쭤린대로 우페이푸를 일개 사단장으로 깔보았는데 호북독군 [[왕잔위안]]이 변란으로 사직한 이후 자신이 [[장쉰]]을 추천하였음에도 진윈펑이 차오쿤이 추천한 우페이푸를 양호순열사로 임명하여 자신과 대등한 지위에 놓자 불만을 품었다. 결국 1921년 경제위기로 인하여 진윈펑 내각이 퇴진하였고 장쭤린은 그 후임으로 교통계의 수령 [[량스이]]를 추천했는데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량스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량스이는 자신이 총리가 되면 직계군벌에게 군비를 신속히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걸어 1921년 12월 25일 총리가 되었으나 경제난 때문에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이어 환계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자 직계군벌은 크게 분노했다. 결국 우페이푸가 먼저 량스이 내각을 토벌하겠다는 격문을 보내 28일만에 량스이 내각은 퇴진했다. 4월에 이르러 봉계와 직계의 충돌이 폭발하면서 1차 직봉전쟁이 시작되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 쑨원과 함께 반직삼각동맹을 체결하여 직계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마적단 출신이 대부분인 봉천군벌은 직계군벌에게 1주일도 안되어 참패했고 장쭤린은 산해관을 넘어 만주로 도주했다. 더 이상 거릴낄 것이 없게 된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총통 쉬스창이 정통성이 없다는 구실로 맹공을 퍼부어 하야하게 하고 1922년 6월 [[리위안훙]]을 대총통으로 추대, 8월 1일 구국회를 복구시켰다. 이어 자신이 총통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왕충후이]] 내각을 [[뤄원간 사건]]으로 뒤흔들어 붕괴시켰으며 1923년 리위안훙도 압박하여 쫓아내고 [[회선 사건]]을 일으켜 마침내 차오쿤이 대총통이 되었다. 그리고 1923년 10월 10일 13장 141개조로 구성된 차오쿤 헌법을 발표하여 중화민국 역사상 첫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시행하진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