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오양시 (문단 편집) == 역사 == 차오양 일대는 고대로부터 고고학적으로 굉장히 풍부한 역사를 지녔다. [[홍산문화]]의 대표적 유적인 뉴허량(우하량) 유적지가 위치하였고, 이후 하가점 하층 문화가 자리하였다. 하가점 하층 문화가 기원전 15세기 경 기후변화로 쇠락한 이후로는 1~2세기 간의 공백기를 거쳐 위영자 문화 → 십이대영자 문화가 발달하였다. 이 중 십이대영자 문화는 최근 고고학적으로 [[고조선]]의 초기 중심문화일 가능성이 높게 여겨져, 고조선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후 십이대영자 남동구 유형([[고조선]]계열 예맥문화)을 거쳐 [[전국시대]]에 [[연나라]]에 정벌된 후 [[요서]]군에 속하였고, 남동부 지역에 류청(유성)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요서군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후 [[오환]]이 이곳을 점령하였다가, [[조조]]가 재정벌하였고, 이후 [[전연]]의 [[모용황]]이 이 곳을 점령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용성 (龙城)이 바로 이곳이었다. 341년에 [[전연]]의 황제인 [[모용황]]에 의해 건설되었고, 342년부터 350년까지 수도였다.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화북 통일 후에 용성은 397 ~ 409년간 [[후연]]의 수도였고 뒤를 이은 [[북연]] (407 ~ 436년)의 유일한 수도로 번영하였다. 이후 [[북위]]가 북연의 영토를 노리고 대대적으로 북연을 공격하자 북연 황제 [[풍홍]]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북위를 위압하고 먼저 용성에 입성한 고구려군은 풍홍과 주민 수만 명을 모두 고구려로 이주시킨 후 용성에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었다. 이후 고구려와 중원 국가들 사이의 국경지대가 된 이 일대는 점점 쇠락하여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는 인구 수천~수백 규모의 소규모 거점 수준으로 전락한다. 오죽하면 [[요서]] 일대를 싹 무시하고 [[베이징|유주]]부터 [[요동]]까지 2천리 구간에 당나라 행정구역이 없어서 보급이 안된다는 말까지 [[당태종]] 입에서 나올 정도. 용성, 즉 룽청은 현재 차오양의 중심부에 위치한 구이다. [[당나라]] 때에는 [[영주]]로 불렸으며, [[요서]] 지방의 중심지였는데,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이 강제로 이주당한 장소가 되었다. 그 유민들 중 일부는 [[이진충의 난|거란의 대봉기 시]]에 [[대조영]]을 따라 발해를 건국하였다. 남은 유민들은 한화 정책에 결국 순응하게 되었지만 [[이정기]]와 같은 호걸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1891년에는 도시에서 한족들의 봉기가 일어나 수천명의 [[몽골족|몽골]]/[[만주족]]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러허성]]에 속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랴오닝성]]에 편입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