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민수 (문단 편집) == 바둑기사로서 행보 == 상당히 촉망받는 기재였지만 얼마 후 미국으로 이민갔고[* 프로자격까지 얻어놓고 미국으로 이민가며 기사생활을 내던진다는게 언뜻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나, 이는 당시 한국 바둑계의 열악한 상황속에서는 특별히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전 우승상금으로 받은 돈이 우승턱으로 다 나가는게 일반적이었을 정도인 때니 말 다했다. 이는 훗날 조훈현과 서봉수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점차 한국바둑이 프로의식을 갖게 됨으로서, 또 인기를 끌며 기사들의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면서 옛말이 되었다.], 미국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지만 [[카지노]]와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사업은 다 말아먹고 이혼까지 당한 후 빈털터리로 귀국했는데, 어머니에 의해 거의 쫓겨나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가서 아예 본격적으로 프로[[포커]]에 뛰어든 것이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무일푼에서 내기바둑으로 밑천을 간신히 확보하여 다시 카지노행, 카지노 딜러와 재혼하였고 부인의 격려에 힘입어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이후 세계적인 수준의 프로 포커 플레이어로[* 1980~90년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판돈의 홀덤에서 평균적으로 '''하루에''' 5~10만불을 벌었다고 한다.]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으며, ~~[[베르트랑 그로스펠리에|너네 아직도 바둑하냐]]~~ 이민 이후 바둑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며 지냈다. 하지만 포커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미국인들에게 바둑을 보급하는 일에 힘썼다. 한국기원은 그 공로를 인정해 계속 '''初단'''에 머물러 있던 그를 1984년에 四단으로 특별히 승단시켜줬다. 여담으로 그가 포커에 뛰어든 것은 바둑 애호가이던 아마추어 포커선수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는 반대급부로 포커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그렇게 세계적인 프로포커 플레이어로 성장해 바둑계와는 더이상 연이 없을 줄 알았던 [[1989년]] 뜬금없이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일본기원에서 현역으로 활약하던 미국인 프로기사인 [[마이클 레드먼드]]를 누르고 본선에 진출했기 때문. 본선진출도 이변으로 여겨지던 와중에 그는 일본의 유명기사인 야마시로 히로시 九단과 오히라 슈조 九단을 연파하여 8강에 진출하더니 8강전에서는 천하의 [[조훈현]] 九단을 이길 '''뻔'''했다. 막판까지 이기고 있다가 10집 이상을 깎아먹는 실수를 하며 역전당한 것(...) 그래서 당시 대국을 검토하던 몇몇 프로기사들은 그가 친구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일부러 '''져준 것'''이 아니냐고도 했다. 차민수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져준 건 당연히 아니라고 즉각 반발했는데, 다만 자신이 한국 최강자를 이길 경우 벌어질 후폭풍이 신경쓰이긴 했다고 한다. 어쨌든 8강까지 진출해서 다음 대회 시드를 확보, 이번에는 첫 경기에서 당대 일본 최강자인 '''[[조치훈]] 九단'''을 이겼다! 초반 실수로 불리해진 바둑을, 좌상쪽 빈 공간을 모두 집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멋지게 성공하며 역전승한 것. 세계 바둑계가 경악하기에 충분했지만 8강에서 [[녜웨이핑]] 九단에게 패하면서 파란은 멈췄다. 이후로는 바둑으로 큰 활약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조훈현 九단과 절친한 사이로 유명하다. 차민수 五단이 공군본부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면서 장교들을 바둑으로 때려잡고 다니자, 그에게 번번이 진 간부들이 당시 공군본부에 현역 복무중이던 조훈현을 데려와서 대리전을 붙인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둘은 군복무 기간에만 100여 판이 넘는 대국을 두면서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덤으로 조훈현과 대결하며 '세상에는 넘사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차민수는 곧장 미국 이민을 택했다나 뭐라나. 또한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바둑이 보급되던 시절 거의 대부분의 게임을 이겼는데 그러다가 자신이 어떻게 플레이해도 반집차로 이기는 상대를 만났다고 한다. 수십판을 내리 두고 물어보니 그 사람이 조훈현이었다는 일화가 월간 바둑에 소개된 적이 있다. [[서봉수]] 九단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데, 그가 고3 때 고1이었던 서봉수와 기원에서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가 3점을 접어줄 정도였는데 단기간에 따라잡히더니, 서봉수 九단이 먼저 프로에 입단[* 서봉수 九단은 1970년, 차민수 五단은 1974년.]한 이후로는 자신이 흑을 잡고도 거의 이기기 힘들 정도가 됐다고(...). [[중국]]에서 일어난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건]]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의 수배에 쫓기고 있던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장주주]] 九단 [[부부]]를 [[한국기원]]으로 데려온 사람이다. [[홍콩]]을 거쳐 [[대만]], [[미국]] 등에 머물며 [[일본]]으로 [[망명]]을 신청했지만 [[일본기원]]에서 활동을 거부당한 루이-장 부부를 차민수 五단이 보고 [[조훈현]] 九단과 상의하여 한국기원에 데려온 것. 이후 루이나이웨이 九단의 활약이 촉매가 되어 한국 여류 바둑이 엄청나게 성장했다. ~~일본기원은 땅을 치고 후회할 듯~~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차민수는 '중국 시장이 커져야 바둑 시장이 성장한다'며 80년대 후반~90년대 중후반까지 한중 바둑 교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가 95년부터 시작해 3회 개최된 '우정배'다. 차민수는 천주더 등을 설득해 1만, 5천위안 수준이던 당시 중국의 기전 상금 10배를 넘는 수준을 상금으로 약속하며 사비로 우정배를 개최하여 바둑 시장을 키운 것이다. 또 당시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껄끄럽던 시절이라, 미국 국적자인 차민수가 녜웨이핑 등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조훈현 등과 친선 대국전을 많이 열어주기도 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결과로 중국 바둑 시장이 커지고 한국 기사들 또한 진출하여 실력을 겨루고 있으니 그의 공헌이 작지 않다 하겠다. 몇 년 전부터는 카지노 관련 사업들과 함께 다시 바둑 쪽에도 신경을 쓰는 듯하다. 한국바둑리그에서 감독 겸 선수를 맡아 활약하기도 했고[* [[한게임]] 팀의 감독을 맡아서 2012년에는 통합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국내기전에도 간간이 출전하는 중. 그리 눈에 띄는 승률이나 성적은 아니지만 신예 기사들을 상대로는 나름 선전하고 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05806710|2014년 4월 14일, 五단으로 승단했다.]] 19기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에 참가하였는데, 예선전에서 승리하면서 五단으로 승단하기 위해 필요한 점수를 채웠다. 2020년 2월 12일에 [[https://n.news.naver.com/sports/general/article/003/0009699430|한국기원 프로기사회장으로 선출]]됐다. 2021년 3월, 六단으로 승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