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경석 (문단 편집) == 항일운동과 독립운동 == 보천교의 교세 확장은 더욱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불러왔는데, 이러는 가운데 1918년에는 보천교인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차경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돌다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의 김연일과 만났으며, 1918년 9월 19일 제주도 법정사(法井寺)에 교도 약 30명을 소집하여 '국권을 회복함으로써 교도는 우선 도내 거주의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인 상민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1918년 10월 6일 밤 김연일은 보천교 신도와 제주도 주민 등 700여 명과 법정사항일운동을 벌였다. 김연일 등은 제주 성내를 돌며 전선을 절단하고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방화 전소시켰다.[* 김철수《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 김재영《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91쪽] 차경석은 보천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가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은 전체 독립운동 지원자금의 50%가 넘는다. 그는 1920년에 3·1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인 [[임규]]에게 5만 원(지금의 약 50억 원)을 보내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임규는 이 돈을 [[나용균]](羅容均)을 통해 임시정부에 보내어 보천교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조달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하였다. 임규는 당시 보천교 진정원의 형평사장(衡平司長)이라는 간부였다. 이와 함께 조선물산장려회의 보천교 측 회원이었다.[*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안후상 저, 학술대회자료집, 2016) 69쪽.] 1920년 4월(음) 보천교인(태을교인) 조준호(趙俊浩) 사건(강원도의 태을교도 독립단원 검거의 건)이 발생했다. 조준호 등은 4월에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다.'고 하며 신도들을 비밀리에 모았다. 또 강원도 이천경찰서에서도 태을교도 14명을 검거하였는데, 원래 倚天敎 교도였던 김문하가 排日사상을 갖고 1920년 12월 5일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으며 태을교도의 수령 차경석은 올해 중에 황제가 된다.'고 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1921년 차경석은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에 보천교 대표 2명을 파견하였다.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는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조직된 외교 지원 단체로 원래 명칭은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한 밑에 있었다. 1922년 차경석은 고려공산당에서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 [[여운형]], 김철, 김상덕, 나용균, 정광호, 장덕수 등을 파견하는데, 자금을 지원하였다. 자금은 [[최팔용]], 장덕수 두 사람에게 건네주어 당시 제3차 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에게 전해주게 하였는데, 당시 1만원(지금의 10억 원)을 지원하였다.[* [[https://web.archive.org/web/20180618130001/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4&levelId=tg_004_2100&ganada=&pageUnit=10]] ] 1923년 차경석은 2월 상해에서 열린 한민족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간부들을 파견하였다. 참가한 100명의 대표자 중에는 보천교 대표로 보천교 진정원이었던 배홍길(裵洪吉)과 김종철(金種喆), 보천교 청년당 [[강일(독립운동가)|강일]](姜逸) 등 3인이 공식적으로 참가하였다. 특히 강일은 1923년 7월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입단하여 김원봉의 지시로 군자금을 모집 임무를 수행하였다.[*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안후상 저, 2016, 학술대회자료집) ] 차경석은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 대한 지원도 꾸준히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23년 7월 만주 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의 밀사 참모 유정근(兪政根) 검거 후 김좌진과 보천교 간부와의 연락 상황을 발견한 뒤 알려졌다.[*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김철수 저,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6쪽.] 차경석은 1924년 9월 김좌진 장군 만주별동대(滿洲別動隊)에 군자금 2만 원을 제공하였다.[*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김철수 저,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5쪽.]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으로 일본은 대대적으로 만주에 병력을 투입한 일본 때문에 군자금을 공급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 전투 준비를 못 하는 상태에 처했지만 차경석에게서 받은 2만여 원으로 부하를 소집하여 일본에 맞서 무력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亞細亞局第3課關機授제32743號)]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은 차경석이 교주로 있는 보천교의 지원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