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쩐흥다오 (문단 편집) == 생애 == 베트남 쩐 왕조의 [[황제]]인 [[진태종|태종]](太宗, 타이똥)의 조카인데 그 족보가 심히 막장스럽다. 타이똥은 지난 왕조의 마지막 여제 [[리 소황]]과 혼인했으나 자녀가 없어, 타이똥과 그 형의 숙부이자 권신인 [[쩐투도]]는 이미 타이똥의 형과 혼인했던 리 소황의 언니를 이혼시키고 타이똥과 재혼시켰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고 쩐흥다오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쩐 왕조는 리 소황의 언니와 타이똥 사이에 태어난 아들 [[성종(쩐)|성종]]이 이어가는데 이 사람은 쩐흥다오의 사촌이기도 하고 이부형제이기도 한 심히 복잡스러운 족보이다. 쩐흥다오는 1257년 [[원나라]] 제1차 침입 때 [[베트남]]의 북방을 굳게 지켜 공을 세웠다. 몽고군의 진격에 맞서 베트남군은 후퇴하며 건물과 다리 그리고 도로를 파괴했고, 몽고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그렇게 해서 몽고군을 지치게 만든 다음 반격을 가해서 몽고군의 침략을 막았다. 이후 5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원나라]]의 제2차 침입(1284년 ~ 1285년)으로 수도 탕롱(昇龍, 지금의 [[하노이]])이 함락되고 황제 [[인종(쩐)|인종]](仁宗, 1257년~1308년)까지 항복을 고려한다. 상대가 상대인 데다 이미 수도까지 털려버려 답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자 쩐흥다오는 《격장사(檄將士)》라는 유명한 글을 써 장수와 병졸들에게 왕조의 위급을 호소한다. 항복할지 항전할지를 망설이는 인종에게 "'''항복을 결정하셨다면 우선 신의 목부터 베어주소서'''"라고 했으며 이에 인종은 항전을 결심했다고 하며 쩐흥다오는 무려 25만에 달하는 장정을 모집할 수 있었다. 다음은 격장사의 발췌문이다. >今余明告汝等. 當以措火積薪為危, 當以懲羹吹虀為戒. 訓練士卒習爾弓矢, 使人人逄蒙家家后羿. 購必烈之頭於闕下, 朽雲南之肉於杲街, 不唯余之采邑永為青氈, 而汝等之俸祿亦終身之受賜. 不唯余之家小安床褥, 而汝等之妻拏亦百年之佳老.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마땅히 장작더미 밑에 불을 놓아둔 위기라고 여겨야 하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본 사람이 찬 나물도 불면서 먹듯이 경계해야 한다.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연습시켜서 모두가 [[봉몽]](逢蒙)[*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명사수.]이나 [[후예]] 같은 명사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쿠빌라이 칸|필렬(必烈)]]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운남왕(雲南王)[* 당시 베트남 원정군의 총대장이 쿠빌라이 칸의 아홉째 아들 토곤(脫歡)이었기 때문에 그를 말한 것인데, 정작 토곤의 작위는 진남왕(鎭男王)이었다. 운남왕에 봉해진 것은 토곤의 동복 형인 우게치(忽哥赤). 여담으로 토곤의 손자인 [[백백태자|바이바이]](佰伯)나 우게치의 현손자인 [[바자르오르미]](把匝剌瓦爾密)는 명에 항복한 뒤 [[홍무제]]에 의해 가족들 모두 '''[[제주도]]'''로 옮겨졌었다.]의 살점을 고가(藁街)에서 썩게 해야 한다.[* 고가는 한나라의 수도 장안의 남문에 있던 거리인데 '''죄인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토곤을 썰어죽이자'는 뜻.] (그렇게 된다면) 나의 채읍(식읍)이 길이 전해질 뿐 아니라 그대들의 봉록 또한 종신토록 주어질 것이다. 나의 권속(眷屬)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의 처자식 또한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 >최귀묵, 『베트남문학의 이해』, 2010 에서 재인용. 하지만 그는 현명하게도 이 병력으로 전면전을 시도하기보다는 [[청야전술]]과 [[게릴라]]로 일관하여 원나라 군대를 괴롭혔다. 베트남도 [[군마]]가 부족해서 [[고려]]와 [[송나라]]처럼 보병 중심이다. 그래서 [[기병]] 중심의 원군과 싸우면 전면전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이런 전술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밀림이 많아 보병 중심의 전술을 펼쳐야 했던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제대로 살린 셈이다. 이런 전술이 원군 입장에선 정말 지옥이었을 것이다. 정글이라 덥고 습한 데다가[* 몽골군의 주력 무기인 각궁류의 합성궁은 습기에 매우 취약하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는 아교가 녹아서 활을 쏠 수가 없다. 베트남군은 현지의 흔한 재료인 대나무 활을 썼을 것이다.] 각종 독충에 맹수들이 우글거리며 병사들을 괴롭히는 게 패시브로 들어가는데 거기에 베트남 군이 1~2만도 아니고 '''25만'''이나 되는 대병력으로 게릴라전을 걸어오니, 사방팔방에서 찌르는 전술에 정신적으로 정말 극한까지 몰렸을 것이다. 때문에 원군은 결국 풍토병과 식량 부족으로 철수한다. 현대의 [[프랑스군]], [[미군]], [[중국 인민해방군]]도 베트남의 풍토병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베트남 군인들은 팔꿈치에 '살달(殺韃, [[타타르|달단]]을 죽이자)'이라는 글까지 새겨 가면서 치열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참고로 고려에서도 당시 몽골을 얕잡아 부르는 이름으로 달단(韃靼)이라고 하였으며 기록에는 달적(達賊)으로도 나온다. 그 뒤 [[원나라]]가 세 번째로 침입(1287년 ~ 1288년)한다. 이에 그는 강폭은 매우 넓지만 도처에 얕은 여울이 있고,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함선의 운행이 자유롭지 못한 지역인 바익당 강(白藤江, 백등강, 현재의 송코이 혹은 홍하)을 전장으로 삼는다. 이곳은 이전 938년 [[남한(오대십국시대)]]의 [[응오꾸옌|침입을 격파]]하고, 981년 [[북송]]의 침입을 격파한 곳이기도 하다. 쩐흥다오는 강바닥에 말뚝을 박은 후 만조(滿潮) 때 원의 수군을 상류로 유인하였다. 그리고는 간조(干潮) 때 말뚝에 걸려 움직임이 멈춰버린 원의 군선들을 공격하여 피해를 크게 입혀 물러가게 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1.bp.blogspot.com/yuanship.jpg|width=100%]]}}}|| ||<:>당시 모습을 묘사한 오스프리 삽화. 오스프리치곤 고증이 좀 부족하다. 베트남 선박을 같은 책의 캄보디아 선박 형태로 고증했다. 중국 선박은 고증이 잘 된 편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reedomforvietnam.files.wordpress.com/1411952168_ba2b1a751e_o.jpg|width=100%]]}}}|| ||<:>[[https://freedomforvietnam.wordpress.com/2010/07/23/tr%E1%BA%A7n-h%C6%B0ng-d%E1%BA%A1o-and-the-mongol-invasions|전투를 묘사한 현대의 그림]]|| 참고로 [[원나라]]의 남방 원정의 주축은 세간에 알려진 "몽골"이라는 이름과 달리 [[한족]], 특히 [[남송]]의 항장 및 항군이 주력이었다. 애초 [[원나라]]에서 [[해군]]은 전부 다 한족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운용했고 이는 [[청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몽골]]이나 [[만주]]의 황무지에서 뛰놀던 유목 민족들보단 바다를 맞닿으며 살아 온 남방의 한족들이 바다를 더 잘 알아서이다. 일본 원정도 [[고려]]를 제외한 원나라 군의 구성원이 거의 90%는 한족 부대였고, 거란과 여진족의 혼성부대가 그 다음이었다. 고려 원정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몽골 제국에서 몽골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큰 민족단위가 아니라 그냥 황족 및 귀족이라 이해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몽골 자체가 소규모 부족에서 출발해 타타르 계 부족들을 흡수하며 불어난 개념이니까. 몽골 제국에서 몽골인은 곧 귀족이라는 말과 같다. 3차 침략까지 물리치기는 했으나 인종은 몽골이 포기하지 않을 경우 [[고구려-당 전쟁|장기적으로는 베트남의 역량이 고갈될 수 밖에 없다]] 판단하고 화친을 위해서 원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고 원나라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면서 원을 상국으로 받들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닥치고 정복을 원하던 쿠빌라이 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4차 원정을 준비케 했으나, 도중에 사망하면서 원나라는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해 베트남 정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베트남은 세계 역사상 [[몽골 제국]]을 구성한 나라의 군을 격퇴한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제국의 무덤|세계적인 슈퍼 파워하고 싸워서 이기는 게 특기인가 보다]]. 물론 당시 베트남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족]] 왕조로부터 독립 투쟁을 펼치고 또한 참파 등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대립을 했기 때문에 군사력이 강하긴 했다. 참파도 몽골이 공격했을 땐 같이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에, 참파의 왕 인드라바르만 5세는 [[적의 적은 나의 친구|감정을 접는 데 합의하고]] 베트남과 손을 잡은 뒤 [[오월동주|함께 몽골에 저항했다]]. 인드라바르만 5세는 몽골이 물러난 뒤에도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얼마 못 가 급사했고, 그 아들 체 만(Chế Mân)이 참파의 왕위에 올라 베트남에게 통수를 갈겼다가 결국 자멸했다. 당시 몽골제국은 베트남보다 더 강력했던 금·호라즘 등을 이미 멸망시킨 당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는데 세 차례나 베트남이 이 몽골을 세 차례나 물리친 것은 놀라운 업적이다. 결국 [[베트남인]]들이 [[중국]]을 물리친 사례에 몽골제국도 추가되어 버렸다. [[당나라]]-[[송나라]]-[[원나라]]-[[명나라]]-[[청나라]] 순으로 [[중국]]의 대군을 [[한족]], [[몽골인]], [[만주족]] 불문 격파한 베트남의 전공은 [[중국]]과의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승리로 마무리 되고 이후의 중국은 다시는 베트남을 못 쳐들어오는 판이다. 쩐흥다오는 전쟁이 끝나자 그 공으로 흥도왕에 봉해졌으며, 성종 이후로 인종과 [[영종(쩐)|영종]](1276~1320)을 보좌하다가 1300년 사망했다. 죽기 직전 영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군대는 가족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여 그 힘으로 대업을 이루십시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