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징기스칸(그룹) (문단 편집) === 헨리에테 스트로벨 === [[https://dk-english.livejournal.com/3542.html?utm_source=3userpost|#]] 본래 이름은 헨리에테 파울리너 스트로벨(Henriette Pauline Strobel).[*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Henriette Pauline Heichel로 개명했지만 현재는 이혼하면서 다시 본래의 성을 사용하고 있다.] [[1953년]] [[11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본래 노래를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징기스칸 데뷔가 노래 경력의 시작이었다. 8살 때 피아노를 배운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적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치과의사로 아버지는 그녀를 치과 조수로 키울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생애 초반은 [[VIVIZ]]의 [[엄지(VIVIZ)|엄지]]를 굉장히 많이 닮았다. 5살 때 피겨 스케이트를 선물받고 너무 기뻐서 매일 빙상을 몇 시간 동안 뛰었으며 9살 때 첫 훈련을 받았고 모두가 그녀의 재능을 인정했다.[* 자신의 롤모델이 미국의 국가대표 선수였다고도 했다.] 13살 때 독일 최남단의 오베레스트도어프로 보내져[* 이때 어린 소녀가 혼자 살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말에 의해 동행한 한 할머니와 둘이서 살았다고 한다.] 5시간의 훈련을 위해 사립학교에 갔다. 오전에는 3시간 운동, 오후에는 2시간 운동을 했고 그녀의 트레이너는 독일 챔피언의 아버지였었다고 한다. 그녀는 작은 대회에 나가 항상 1등을 하였다고 하나 훈련 도중 오른쪽 다리를 단단한 보드에 찧은 사고로 인해 다리와 발목이 [[골절]]되어 6개월간 쉬었어야 했고 이후 다시 도전하였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결국 스포츠를 그만두었고 빙판 위의 꿈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 중학교를 마치고[* 독일로 이주해서 1년을 더 했다고 한다.] [[스위스]]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 치과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일을 평생 하고싶지 않았고 [[취리히]]에서 미용사일을 배웠고 이때 2년간 모델일도 했다고 한다. 볼프강 하이헬과 처음 만난것도 이때라고 하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볼프강 하이헬이 술집에서 밴드 공연을 할 때 너무 거칠게 해서 그만 '''마이크로 이빨을 쳐서 깨 버렸다.''' 오너는 게스트로 와 있던 헨리에테가 치과에서 일한다는것을 알고는 볼프강을 그녀에게 보냈고 이때부터 알게된 사이라고 한다. 그들은 반 년 뒤인 [[1976년]] [[4월 9일]] 결혼하게 되었고 뮌헨으로 이사가서 치과를 공부했다. 그때 볼프강은 스튜디오 음악을 하고 헨리에테는 집에서 몇 가지의 모델링 작업을 하였는데 이 와중에 [[1978년]] 볼프강과의 사이에서 득남했다.[* 아들의 이름이 쿠르트 하이헬(Kurt Heichel)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어느 날 볼프강 하이헬은 랄프 지젤에게 새로운 그룹의 멤버로서 영입되었고 헨리에테에게 함께 노래하자고 제안했다. 가끔씩 노래를 부르던 헨리에테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인데 처음에는 무조건 싫다고 답했으나 볼프강은 헨리에테를 아예 랄프 지젤에게 끌고 가 버렸다. 결국 헨리에테는 노래를 불렀는데 랄프 지젤은 바로 계약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979년 징기스칸으로 데뷔하였고 [[1985년]] 그룹 해체, [[1986년]]에는 볼프강과 이혼하였으며 징기스칸 패밀리를 결성하여 [[1987년]]까지 무대에 섰다가 가수 생활을 종료하게 된다. 볼프강과 이혼만 했을 뿐 아직도 여전히 친구로 지낸다. 시간이 흘러 [[2005년]] 볼프강 하이헬, 에디나 팝, 스티브 벤더와 슈테판 트라크 등의 가수들과 함께 복귀 공연을 가졌으며 현재 에디나 팝과 젊은 가수들과 같이 징기스칸 활동을 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