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징기스칸(그룹) (문단 편집) === 루이 헨드릭 포트기터 === [[http://dk-english.blogspot.com/2010/12/in-honour-of-world-aids-day-i-bring-to.html?m=1|#]] 그룹의 '''칸'''이었던 루이 헨드릭 포드기터는 [[1951년]] [[4월 4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조상은 [[네덜란드]] 출신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며 그의 아버지는 [[프리토리아]]의 영업 이사였다고 한다. 또 그에게는 한 명의 형제와 4명의 여자 형제가 있었다. 그는 학교 축제에서 춤을 추고 안무를 만들기도 했으며 학교를 마친 후에는 2년간 그래픽아트를 공부하여 패션 디자이너, 음악가, 댄서의 꿈을 가졌다고 한다. 21세까지 아무런 발레 수업도 받지 않았으나 요하네스버그 극장의 발레 감독을 소개받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감독은 3개월의 [[수습]]기간을 주었고 그는 그 3개월간 연습실에서 매일 6, 7시간을 연습했다.[* 이걸 그는 3개월간 동물처럼 연습해서 뼈에 감각이 없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그럼에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고용되었으나 그의 자리는 맨 끝줄이었다. 그리고 2년 후에 그는 솔로 댄서로 데뷔하여 그의 큰 꿈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발레 단장으로서 [[독일]] [[울름]]으로 간 그의 친구의 초대로 루이스는 독일로 떠나 울름에서 1년을 생활하고, [[스위스]]의 장크트갈렌에서 1년을 보냈는데 그는 큰 무대에 서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다가 [[프랑크푸르트]]로 여행 갔을 때 1년에 서너번 보는 오디션에서 합격하여 [[뮌헨]]의 극장에 고용되었다. 그는 그 극장에서 [[오페레타]]를 해야 했으나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나 극장에서의 생활은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연히 다양한 TV쇼에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유명한 안무가 윌리엄 밀리(William Millie)가 댄서를 찾고있던 랄프 지젤에게 데려가 관심을 끌도록 하여 그는 오디션에서 통과하였다. 그는 그 전까지 징기스칸의 멤버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그때 당시 그룹의 성공을 믿었을 거라고 자신에게 물어봤었다면 아니라고 천번 이야기했을 것이라 말했다. 루이는 데뷔 후 가운데서 춤을 추는 퍼포먼스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그룹 해체 후에는 1986년 레슬리 만도키, 헨리에테 하이헬과 함께 다른 가수들과 징기스칸 패밀리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으나 1993년 안타깝게 [[에이즈]]로 사망해 사람들의 추모를 받고 있다. 그가 사망한 후에는 2대 칸인 슈테판 트라크가 그의 빈자리를 대신했으나 2018년에 탈퇴하면서 이후에는 보조 멤버로도 활동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