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회 (문단 편집) === 조선에서의 평가 === 중국에서도 까이는 판국이니 중화권 영향을 많이 받은 조선에서도 당연히 까였다. 다만 진회가 본격적으로 욕을 먹기 시작한 것은 조선 [[성종(조선)|성종]] 때부터로, 조선초는 오히려 진회보단 남송을 멸망시킨 [[가사도]]를 더 악명 높은 간신배로 꼽았다. 하여튼 성종 때 [[동국통감]]에선 "그 충성스럽고 의로운 속마음은 곧바로 얼음과 서리[氷霜]·해와 달과 더불어 그 광채를 다툴 만합니다. 아! 한나라의 충신 주운(朱雲)이 배척했던 자는 [[후한]]의 권신 장우(張禹)였고, 송나라의 충신 [[호전(胡銓)]]이 논박했던 자는 진회(秦檜)였는데, 지금 신돈은 나라에 두 임금 행세를 하면서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마음대로 부렸으니, 그 기세의 대단함이 어찌 장우·진회의 정도에만 그쳤겠습니까?"라면서 [[신돈]]을 까는데 진회가 쓰였다. 성종실록에도 거론이 되었는데 내용에 보면 "노기와 진회의 간계가 마침내 나라를 그르치는데 이르렀는데도, 당시의 인주가 이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하고 이를 갈게 합니다."라고 했다. 이순신도 [[난중일기]]에서 '[[유몽인]]([[어우야담]]의 저자)'을 진회로 빗대어 비판한 부분이 있다. 당시 유몽인은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이순신 관할인 전라도의 지방관들을 평가하고 수군의 징발 문제를 비판하였는데 --디스 잘하는-- 이순신은 이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중일기에 이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전략)'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 없이 눈앞의 임시 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남쪽 지방의 종작없는 말만 듣고서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무목(악비)에 대한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갑오년(1594년) 일기 2월 16일 내용 그 외에도 [[류성룡]]도 북인세력의 탄핵을 받아 실각할 때, 진회와 같다는 오명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류성룡은 진회와 다르게 누구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노력했던 충신이자 명재상이었다. 또한 [[최명길(조선)|최명길]]도 주화를 주장하다가 [[김상헌(조선)|김상헌]] 등 척화파에 의해서 진회와 같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진회가 간신짓을 하거나 포악한 정치를 펼치면서 악비를 모함한 것과 다르게 최명길은 누구보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으며 또한 조선을 진심으로 위한 충신이었고 또한 청렴하고 선정을 펼친 명재상이었다. 또한 최명길은 진회와 다르게 척화파인 김상헌의 생각도 옳다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