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회 (문단 편집) === 비판론 === 진회는 [[한족]] 기준에선 [[오랑캐]]인 [[금나라|금]]과 대항해 싸운 [[악비|유능한 장수]]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이후에도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공포정치를 펼쳐 반대파를 숙청]]해 큰 비판을 받았다. 문서 맨 위의 사진처럼 악왕묘 앞에 진회가 부인 왕씨와 함께 무릎을 꿇은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아직도 악비를 참배하는 사람들은 진회의 동상에 침을 뱉는다고 한다. 지금은 침을 뱉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지만 아직도 그렇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의 지식인이었던 왕부지는 진회를 [[가사도]] 이상으로 위험한 최악의 간신으로 평가했고, 청 [[건륭제]] 때 진회의 후손이었던 진대사(자는 간천)는 과거에 급제하고 금의환향하다가 악비 무덤 앞의 먼 조상 진회 부부상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송 왕조 이후로 "회"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악비의 무덤 앞에서 "진"이라는 성 때문에 참담해 하는구나! 이 때문에 아직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진회를 도운 묵기설(万俟卨, 흔히 만사설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여기서 万俟는 만사가 아닌 墨棋(mo qi)와 같은 발음으로 묵기라 읽는다)이라는 간신[* 후에 일을 잘못해 쫒겨나 유배생활을 했다가 진회 사후 재상으로 돌아왔다.] 역시 그의 고향에서 그의 존재를 부끄럽게 여겨 묵기라는 성씨를 모두 개성(改姓)해버렸고, 묵기라는 성씨는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인들 사이엔 진회를 미워하는 감정이 드러나는 몇몇 속담까지 있는데, "[[왕따|진회도 친구 셋은 있다.]]", "칼을 천 번 맞을지언정 진회와 사귀지 않는다." 같은 것이 그것이다. 또한 진회 부부를 조롱하려 만든 음식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유탸오]] 문서를 참조. [[이름에 대한 금기|이름]]에서부터 [[속담]]에다, [[유탸오|사람이 매일 먹는 음식]]으로까지 이렇게 까는 것을 보면 진회에 대해 얼마나 악명이 높은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오늘날 [[악비]]의 명성을 만든게 아이러니하게도 '''[[자업자득|진회 자신]]'''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악비가 무리한 북벌을 감행하려했다 비쳐졌다 한들, 옛 수도 [[카이펑시|개봉]]을 비롯한 북쪽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명분론 역시 남송에서 팽배했던 것은 사실인데 '''진회는 이들을 진심으로 설득하는 대신 그냥 힘으로 찍어누르기 바빴다'''. 오죽하면 진회를 두둔해 함께 욕을 먹는 [[고종(송)|송고종]]조차도 진회의 '남인귀남, 북인귀북(남쪽 사람은 남쪽으로 돌아가고 북쪽 사람은 북쪽으로 돌아간다)'이라는 현상유지 주장엔 "그렇다면 짐은 북인인데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가?"라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을 정도였다. 당시 종택 같은 사람은 끝까지 북쪽 땅 사수를 외치며 '강을 건너라!'를 유언으로 남겼을 마당이니, 그 밑에 있던 악비, [[한세충]] 같은 이들이 그런 기조를 내세우는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물론 조정 입장에선 이렇게 병권을 잡고 있는 명장들이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웠을 수 있다 치지만, 그렇다고 조국에 헌신한 장수들의 군권을 하루아침에 빼앗고, 군권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좌천]]이나 파직 심지어 [[귀양]]도 아닌 별 다른 명분도 없이 '''[[토사구팽|죽여버린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당장 [[한세충]]이 [[악비]]가 죽을 이유를 대라고 외쳤을 때 진회가 한 말은 고작 '''막수유(아마 있을지도 모른다)'''였다.[* 이에 필적할 말로는 명대 [[탈문의 변]] 이후 반정의 주역인 서유정이 명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우겸]]을 누명을 씌워 처형할 때 했던 "비록 분명한 흔적은 없지만 그런 뜻은 있었다(雖無顯迹, 意有之)."가 있다.] 한세충은 [[고종(송)|송고종]]이 반란군에게 위협당할 때 그걸 혈혈단신으로 진압한 사람이자 그가 지키는 지역은 감히 금군도 얼씬 못했다고 전해지는 명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보기에도 진회는 '''천하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쳤고, 이것이 오늘날 진회의 악명을 키운 꼴이 되고야 만 것이다. 그래서 이런 야사도 있다. >악비 처형전 날 진회는 악비를 찾아가 ,"그대의 죽음으로 그대는 충신으로 기록될 것이고 나는 희대의 간신으로 기록될 것이요. 그러나 그것은 알고있소?, 살아있는 동안의 승자는 나요."라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학계와 달리 일반 대중들의 진회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예전과 비슷하며 악왕묘는 그대로이다. 양계초는 진회를 후한의 십상시, 진의 조고, 당의 노기와 이임보, 북송의 채경, 남송의 한탁주, 명의 류진과 위충현과 동급으로 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