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회 (문단 편집) == 생애 == 1090년 가난한 현령집에서 태어난 진회는 1115년 [[과거]]에 합격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1127년 [[북송]]과 같이 [[요]]를 격파한 금이 북송이 약속한 세폐를 바치지 않자 대군을 이끌고 [[카이펑시|개봉]]을 포위한 후 약속한 세폐와 북송의 북방 영토 3진을 위약금으로 요구하였다. 당연히 송[[휘종]]과 조정은 주전론을 선택하려고 하자 진회는 휘종과 흠종, 그리고 조정에 다음 같은 장계를 올린다. >"금나라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3진으로 만족하지 않고 3진을 받으면 다음에는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저들에게 약속한 세폐와 영토 3진 중 1진을 주어 시간을 벌고 그 시간 안에 우리의 방위를 굳건히 한 다음, 백관들과 논의하여 금나라와의 관계를 정하시고 그 전까진 폐하는 금의 사신을 직접 대면하지 말고 전각 밖에서 신하를 통해 접견하소서."[* 물론 진회도 원칙적으론 주전파였으나, 이 내용을 보면 일단 금나라를 달래고 방비를 굳건히 한 다음에 싸우자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주전론을 선택한 북송은 진회의 장계를 기각하고 전쟁을 선택하였고 송의 시간 끌기를 눈치 챈 금은 바로 송을 공격한다. 문제는 송휘종과 흠종, 주전파 신료들이 결정한 전쟁이란 것이 징병하고 재물을 풀어 병사를 사기 진작하는 방법이 아니라, '''[[곽경]]이라는 사이비 도사에게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재물 천금을 주고 어린 아이 7777명을 육갑신병이라는 신병으로 변신시켜 금군을 물리친다는 황당한 방법]]'''이었다는 것. --[[육갑]][[병신]]-- 곽경이 엉터리 제사를 지내는 동안 송조정과 황실은 술을 마시며 방비를 게을리 하였다. 그러나 곽경은 금군이 개봉부 근처까지 진군하여 그 모습을 보이자 재물을 갖고 도주하였고 뒤늦게 이를 안 송은 혼란에 빠진다. 결국 개봉부가 금군에 함락되고 송황제마저 포로로 잡히는 [[정강의 변]]이 터지자[* 여기서 진회는 장방창을 초의 괴뢰 황제로 삼을 것을 반대하였다.], 진회 역시 [[금나라|금]]에 포로로 끌려갔고, 완안창의 눈에 띄어 완안창의 참모가 되나 1130년 완안창이 초주를 공격하는 틈을 타 탈출해[* 여기서 감시하는 금군을 죽이고 탈출했다고 말한다.] 이후 [[남송]]의 [[고종(송)|고종]]을 섬겼다. 처음엔 진회를 금의 첩자로 본 남송 조정의 의심도 받았으나, 진회가 주화론을 주장하며 악비 같은 군벌을 견제하자, 정통성이 부족하던 고종은 진회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해 귀부한 것으로 보고 총애하여 돌아온 다음 해 진회를 재상으로 임명한다. 1142년, 결국 진회는 금과의 화평교섭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문제는 그러고 죽을 때까지 공포정치(...)를 펼쳤다는 것인데, 특히 앞선 "막수유"에서 보듯 주전파의 대표자 [[악비]]를 싫어해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사실상 [[사법살인]]한 셈. 진회는 19년간이나 재상 자리에 있었고 죽은 뒤엔 성대한 [[장례식]]도 치뤘다. 그래도 그를 노리는 사람은 있었던지, 한번은 시전이라는 사람이 입궐하는 진회를 암살하려고 칼을 휘둘렀으나 빗맞았고, 진회는 놀란 말에서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부턴 경비병 50여 명과 같이 다녔다고 한다. 진회 사후 그의 일가 권력은 고종의 양자 [[효종(송)|송효종]]이 강력하게 권력승계를 막으면서 사라졌으며, 훗날 발견된 그의 묘를 보면 [[도굴]] 흔적이 있는 듯 하다. 한편, 진회가 어떻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었는지는 논란이 좀 있는 편이다. 전통적으로는 진회가 실권을 휘두른 권신이라는 관점이 주류였고, 송고종은 기껏해야 간신에게 농락당한 암군이라는 이미지였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 진회는 송고종이 권력 유지를 위해 내세운 총알받이에 [[꼭두각시]]였고, 악비 모함 사건 등의 진정한 흑막은 송고종이다."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진회도 분명 능동적으로 권력을 노렸고 송고종도 후술되어있듯 진회를 경계해 '신에 칼이 들어있는 우려'[* '신에 칼이 들어있는 것처럼 불안하다', 혹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 신에 칼을 숨겨야 했다'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를 겪었다는 등 반론이 있으나, 이에 대해 송고종이 진회가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악비 뿐만 아니라 악비의 양자 악운과 그 주변 사람들까지 강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하고 이를 실행하는 기록이 있는 등 재반론 증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