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한 (문단 편집) == 상세 == [[고대]]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했던 소국들을 지칭한다.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서 [[낙동강]] 동쪽 지역이, '대부분 옛 진한에 해당'되며 그 중 하나였던 '경주 [[사로국]]이 점점 성장'해, 다른 '소국들을 흡수'하면서 《[[삼국사기]]》 기록 상으로는 [[1세기]]~[[3세기]],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6세기]] 경, 대부분 '사로국이 발전한 [[신라]]에 완전히 흡수/통합'되었다. [[진왕]]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12개국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을 존중해 [[마한]]의 [[목지국]] 왕으로 보는 설이 있다. 한편《[[양서]]》 <신라전>에서는 진왕 대신 '진한 왕'이라고 하고 있으며 《[[진서]]》 <진한전>에서는 '진한 왕'이 중국에 조공하고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진한 왕'에 대한 기록에서 후대 판본으로 넘어가면서 글자가 빠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는 마한의 진한에 대한 영향력을, 후자는 진한 12국을 아우르는 중심적 정치체의 존재(아마도 [[신라|사로국]]?)를 입증해야 하는 과제가 있지만 어느 쪽도 확실하지는 않다. 일단 어느 쪽이 됐든 서로간에도 영 따로 놀던 진한 지역을 후대의 중앙집권국가마냥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능력이 있었다기는 힘들고, 명목상의 지배자였다고 보는 편이다. 고고학적으로도 [[3세기]] 진한 각 지역을 비교해봤을 때 경주 덕천리, 조양동, 황성동, 울산 중산리, 하대리, 포항 옥성리, 경산 임당 등의 목곽묘 크기와 부장품을 비교해 보면 서로 비슷비슷한 수준이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다. 서열 정도는 존재했겠지만 세력간 격차가 커서 특정 국가가 나머지 소국들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강력한 진한 왕 같은 건 이 무렵에 존재하기 힘들다. 초기 신라([[사로국]])가 독보적으로 강해지는 것은 100여 년이 지난 [[4세기]] 경부터였다. 2014년 [[5세기]] 후반~[[6세기]]에 조성된 [[경상북도|경북]] [[의성군|의성]] 지역 고분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금동관모[* 백제식 금동관은 [[경기도|경기]] [[화성시|화성]], [[충청남도|충남]] [[천안시|천안]], [[서산시|서산]], [[공주시|공주]], [[전라북도|전북]] [[익산시|익산]], [[전라남도|전남]] [[고흥군|고흥]]에서 출토되었으며, 수도 지역이 아닌 지방에서만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지방세력 포섭을 위한 하사품으로 추정된다.[[https://blog.naver.com/dndudwp99/221357895428|#]] 백제 중앙세력은 금동관이 아닌 오라관(검은 비단모자)를 쓰고 금제, 은제 장식을 부착하는 방식이었다.]가 출토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 지역은 진한 소국 중 하나인 [[소문국]](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백제식 금동관모와 함께 '[[의성]] 양식 [[토기]]'[[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21414&cid=51938&categoryId=54602|#]][* [[경상북도|경북]] 북부지역인 [[의성군|의성]], [[군위군|군위]], [[상주시|상주]], [[예천군|예천]], [[안동시|안동]], [[영주시|영주]], [[봉화군|봉화]], [[청송군|청송]]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로 [[경주시|경주]] 지역 토기와는 다르다.]와 규두대도(圭頭大刀), 삼엽문 [[환두대도]](三葉文 環頭大刀) 등의 최상위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 이사금]]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당시 의성 일대의 진한이 [[신라]]에 의한 ‘정벌’이나 ‘합병’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51202.010100736120001|#]] [[경북]] [[상주시|상주]] 일대의 진한 사벌국의 경우 [[삼국사기]]에서는 [[사로국]] [[첨해 이사금]] 시기([[3세기]])에 사벌국이 백제와의 결속을 도모하자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상주 일대의 토광묘 유적을 보면 [[4세기]] 중반까지는 독자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최종적으로는 [[6세기]] 법흥왕대에 사벌국의 옛 지역에 상주(尙州)를 설치하고 군정과 행정을 담당한 군주를 파견함으로써 사벌국은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했을 것으로 보인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5638|#]] 문화는 [[마한]]과는 달리 [[성벽]]과 [[집]]이 있었으며 각 마을에는 우두머리 군장을 두었다고 한다. 이들 군장중 최고 우두머리는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했다고 한다. 낙동강 건너편의 [[변한]]과는 편의상 구분을 하긴 했지만 《[[후한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언어]], 법속, [[의식주]]가 다 똑같고, 다만 [[제사]] 풍속만 약간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주보돈]]은 《삼국지》 기사에서 진한인의 경우 이주민이라는 자의식이 있다고 나오는데 반면 변한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비록 진한과 변한 모두 토착인이 다수긴 하지만 지배집단이 외래계인 진한과 토착인인 변한으로 나눠진다면, 모시는 조상신이 다르다는 것이 《삼국지》를 쓴 중국인에게는 제사를 지내는 신이 다른 것으로 비춰진 것이 아닐까 추론하기도 했다.][* 어차피 제사의 예법이란 건 기본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문화라 현대에도 같은 도시 같은 마을에서도 집안마다 서로 신기해할 정도로 다른 경우가 많으니 다른 문화가 같은데 제사만 약간 다르다는 정도는 유의미한 문화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진한과 변한 사람들은 '뒤섞여 산다'(雜居)고 표현하고 있었으므로 경계 자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도 《삼국지》에서 말하는 2세기 진한과 변한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을 보면 그다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무덤만 해도 진한과 변한이 거의 공통 양식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만큼 비슷하다가 4세기 후엽쯤 가야 가야의 석곽묘, 신라의 [[적석목곽묘]]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얼핏 보면 [[낙동강]]이 변한과 진한의 경계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세하게 따지면 [[부산]] 지역 같이 낙동강 동쪽이 변한권이라든가 반대로 낙동강 서쪽이 진한권인 경우도 있었다. 칼 같이 나뉘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낙동강 상류는 진한에, 중류와 하류는 변한인 편이었다. 변한과 마찬가지로 [[철(원소)|철]]이 풍부한 지역이라 철을 [[화폐]]로 삼았으며,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머리를 [[암석|돌]]로 눌렀다고 한다. 이걸 '[[편두]]'라고 하는데, 이 전통은 후에 [[가야]]로까지 이어져 [[가야]] 시대 [[무덤]]을 발굴하면 [[두개골]]이 납작하게 눌린 채로 발견되는 무덤이 있다. 진한의 후신인 신라도 편두를 했다고 추정되는 몇몇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그런 두개골은 발견된 적이 아직 없다. 편두한 것으로 추정되는 변형 두개골이 실제로 발견된 곳은 김해 예안리 고분군인데 여기가 진한이랑 가까운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낙동강 건너 변한권이다. 근데 또 그 옆에 있는 금관가야의 중심지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편두 유골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신생아의 머리를 돌로 누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신생아의 두개골은 숨골이 열려 있기 때문에 어른의 손으로 눌러도 아기에겐 위험한데 무거운 돌로 누르면 아기를 죽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머리를 돌로 누르는 건 어른도 버티기 힘들다. 이 문제 때문인지 청나라의 《[[만주원류고]]》[* 사실 이 서적은 청나라 시절 만주족들이 진한, 변한, 마한, 백제, 신라, 옥저, 발해 등등 여기저기를 모두 만주족 역사(...)로 왜곡하기 위해 만든 서적이었다. 왜곡을 하기 위해서라지만 나름 연구도 했던 모양.]에서는 [[건륭제]]가 직접 집필한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訂謬)를 인용해 《[[후한서]]》의 기록을 반박하고 있다. [[만주족]]의 풍습에 아기가 태어나면 요람에 아기가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반듯이 오랫동안 눕혀두었는데 그렇게 하면 머리 형태가 편두처럼 평평해진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정말로 머리를 돌로 눌렀다기보다는 아이를 요람에 반듯하게 눕혀서 재웠기 때문에 머리가 평평해졌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추측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