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윈펑 (문단 편집) === [[국민혁명]] 시기 === 이후 중앙은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직계가 차지했다. 직계는 1923년 [[회선 사건]]을 일으켜 직계의 수령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옹립했으나 [[중국 국민당]]이나 [[안휘군벌]]의 잔여세력, 만주에서 세력을 보전한 [[봉천군벌]]의 불만을 사고 있었고 1924년 9월 직예군벌이 상하이를 탐내서 절강독군이자 안휘군벌인 [[루융샹]]을 상대로 일으킨 [[강절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났다. 2차 직봉전쟁에서 직예군벌은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던 [[펑위샹]]이 내부에서 일으킨 [[북경정변]]으로 몰락했고 봉천군벌이 천하를 차지했다. 하지만 봉천군벌도 강남으로 무리한 확장을 하다가 직예군벌의 잔여세력인 강소독판 [[쑨촨팡]]이 일으킨 [[손봉전쟁]]에서 패하였고 이어 [[반봉사건]]까지 겪으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봉천군벌은 [[펑위샹]]을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고 [[우페이푸]], [[쑨촨팡]], [[옌시산]]과 연합하여 1926년 [[직봉풍전쟁]]을 벌여 펑위샹을 토벌했다.그동안 진윈펑은 톈진에서 사업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1926년 [[돤치루이]] 임시집정정부가 대고구 사건과 3.18 시위 이후 국민군의 압박으로 하야하자 우페이푸는 차오쿤 헌법의 회복과 국무원 복구를 선언했다. 주도권 싸움에서 역습을 당한 봉천군벌은 진윈펑을 내각총리로 주장했지만 우페이푸는 옌후이칭을 국무총리로 지지했다. 결국 옌후이칭이 국무총리로 복직하면서 진윈펑의 내각 조직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런데 1926년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 국민당]]이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면서 양호와 하남을 지배하던 [[우페이푸]]가 [[국민혁명군]]에게 두들겨 맞아 몰락하고 오성연군 총사령관 [[쑨촨팡]]도 국민혁명군의 공격에 몰락했다. 이때 쑨촨팡은 진윈펑을 [[돤치루이]]의 대표로 초청하여 우광신, 유종기, 양문개, 우페이푸의 대표 웅병기 등과 함께 난징에서 회의를 열고 국민혁명군에 대항하려 했지만 진윈펑이 돤치루이를 영수로 추대할 것을 주장하자 우페이푸의 대표 웅병기가 진윈펑을 마구 비난하면서 회의는 무산되었다. 이에 [[장쭝창]]을 중심으로 [[북양군벌]]의 단합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쑨촨팡]], [[장쭝창]] 등은 [[장쭤린]]을 중심으로 뭉쳐 장쭤린을 안국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중국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구실로 국민혁명군에 대항하려 했다. 1926년 12월 22일, 장쭤린은 [[우쥔성]], [[장쭤샹]] 등과 논의하여 진윈펑을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하려 했고 진윈펑은 신이 나서 총리에 취임하려 했지만 우페이푸가 진윈펑을 반대하면서 진윈펑의 국무총리 임명은 다시 한번 무산되었고 대신 국무총리 서리 겸 외교총장 [[구웨이쥔]]이 1927년 1월 12일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후 장쭤린이 대원수에 취임하면서 [[판푸]] 내각이 수립될 때도 배제되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면서 베이징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장쭤린은 봉천으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하려 했는데 이때 진윈펑도 장쭤린과 함께 기차에 타 봉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톈진에 도착했을 때 일본 영사관에서 진윈펑의 친우인 사카니시 리하치로가 사람을 보내 진윈펑에게 할말이 있으니 하차할 것을 청했고 이에 진윈펑은 [[판푸]]와 같이[* 판푸의 경우, [[장쭝창]]을 만나야 한다고 내렸다.] 톈진에 내려 자택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황고둔 사건]]이 터져 장쭤린이 죽은 것을 듣게 되었다. 진윈펑이 톈진에서 내린 것은 진윈펑이 휘말려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일본의 계획으로 추정된다. 장쭤린이 죽은 것을 알고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