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시황릉 (문단 편집) ==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 병마용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모라는 설도 있다. '''재야''' 고고건축학자 천징위안(陳景元)은 <병마용의 진상>이라는 책에서 근거 60여 개를 제시하며, 병마용의 실제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 할머니이자 진 [[소양왕]]의 모후로서 강력한 섭정을 펼쳐 '2천 년 전의 서태후(西太后)'라고 불리는 '진나라 [[선태후]](宣太后)'[* 이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중국 사극이 [[미월전]]이다.]라고 주장했다. 천징위안은 일반 사병들도 갖췄던 투구를 진시황의 친위군단이 착용하지 않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의상 역시 빨간색과 보라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진시황은 검은색을 숭상하도록 법령으로 공포할 만큼 검은색을 선호했으므로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직후 화폐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하면서 전술운용을 용이하게 하고자 전차의 너비도 통일했는데,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차량들의 바퀴 너비가 일정치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용맹무쌍하기로 이름났던 당시 진나라 병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무사용들은 수염을 기른 늙은이 형상에 우울하고 기운 없는 표정이란 점도 의문이라고 했다. ||[[파일:external/pic.pimg.tw/1420963309-1032564525_n.jpg|width=100%]]|| || 1호 용갱에서 발견된 '''[[상방]][[여불위]](相邦呂不韋)'''라고 새겨진 [[과(무기)|꺾창]][* 왼쪽이 위쪽이다.] || 하지만 이런 주장을 대부분 고고학자들이 동의하지 않고 반박한다. 위 사진처럼 병마용갱의 1호 용갱에서 발견된 [[꺾창]]에 [[여불위]]의 이름이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에 설치한 관청 이름이 새겨진 점, 병마용갱의 바닥에 깔린 벽돌이 진시황릉 곁에서 나온 다른 부장품 구덩이의 벽돌과 동일한 점, 병마용갱 외에도 위에서 설명한 많은 부장품 구덩이가 진시황릉 곁에 있다는 점 등이 병마용갱은 역시 진시황릉의 부속시설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채색 문제도 원래 병마용갱의 토용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채색이 되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사라졌을 뿐 색이 남은 일부 인형은 검은색으로 칠한 것이 많다. 천징위안이 보라색이라 주장한 색도 고고학자들은 칠할 당시에는 검은색이었다고 판단한다. 또한 천징위안이 주장한 투구 문제는 두 가지 설명으로 반박 가능하다. 우선, 진시황릉의 다른 부장품 구덩이인 개갑갱에서는 돌조각으로 만든 모형 갑옷과 함께 투구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병마용들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전투준비태세를 갖춘 모습을 모형화한 것이라, 투구를 아직 쓰지 않았다고 형상화했으리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진나라 이후 한나라 시기까지도 무기, 도구의 주류는 청동기였는데, 청동제 무기로 베면 날이 부러지기가 쉬워서 무기의 대부분이 창 같은 찌르는 것이었다. 이에 근거리에서 머리에 칼 등으로 가격을 당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찌르기 공격이 집중되는 가슴 부위에는 갑옷을 착용하여 방어를 단단히 하는 반면, 투구는 구태여 착용하지 않고 대신 관모를 쓰는 정도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천징위안이 선태후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병마용갱 바로 옆의 아직 발굴되지 않은 대형 무덤 또한 선태후 시대 무덤 구조와는 다르고, 오히려 위에 나온 진시황의 자녀 무덤으로 추정되는 배장묘와 구조가 거의 같다는 점도 천징위안의 주장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정황 증거다. 진시황릉 주변에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진한대(秦漢代) 왕릉이 아직도 무수히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