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시황릉 (문단 편집) == 건설 과정 == 당연히 규모에 걸맞게 거대공사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시황제 즉위 직후부터 작업에 착수하여 통일 이후부터는 총인원 70만 명(추정)[* '70만 명'이란 숫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황릉의 정신나간 규모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조숙한 근대 중앙집권 국가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한 진나라의 행정력을 생각하면 최소한 이에 준하는 인원이 동원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을 동원해서 지었지만, 즉위 35년이 넘어서도 완성하지 못하고 [[사구정변|진시황이 먼저 죽었다]]. 이후 2세 황제 [[호해]]는 여러 동물과 진시황의 후궁과 그 자녀들, 그리고 인부들을 순장하여 무덤 공사를 끝냈다.[* 사마천, 사기 진시황본기] 호해가 자기 일가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공자 고(高)는 가족들이 연좌될까 두려워 호해에게 먼저 죽음을 청한 덕분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으나, 나머지 공자들은 시장에서 참수당하고 공녀들은 사지가 찢겨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마천, 사기 이사열전] 그리고 실제 진시황릉의 배장품(陪葬品) 구덩이에서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다. 그중 남자 5명과 여자 2명이 묻힌 무덤에서는 도장[* 도장은 귀족사회에서 고위 계층을 상장하는 물건이다. 부장품 도장으로 추정컨대 남자 중 한명의 이름은 榮祿(영록), 여자 중 한 명의 이름은 阴嫚(음만)으로 추정된다.]이 포함된 금, 은 비단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부장품이나 [[관(장례)|관]]이 발굴되었지만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혔거나 특히 여성들의 시신은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2세황제 [[호해]]가 죽인 형제자매들, 진시황의 후궁들 등 [[순장]]된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추정한다.[[https://baike.baidu.com/item/嬴阴嫚|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