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시황릉 (문단 편집)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진시황 병마용갱1.jpg|width=100%]]}}} || || 진시황릉 주변의 병마용갱 || [[중국]]의 [[산시성(섬서성)|산시성]]의 [[시안시]] 린퉁구에 있는 [[진시황]]의 무덤으로, [[1974년]]에 [[병사]]와 [[말(동물)|말]] 등의 [[테라코타]] [[모형]](병마용)이 8천 점이나 발견되었다. 발견 이후 지금까지도 발굴이 진행 중인데, 진시황릉으로 추정되는 언덕(맨 위 사진)은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이유는 [[저우언라이]]가 지적했듯이, 후손들을 위해서 발굴기술이 완벽해질 때까지[* 수천 년간 밀봉된 무덤이 급히 열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병마용의 도색이 바랜 것도 외부공기와 갑자기 접촉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견 당시는 [[문화대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문혁 당시 [[공자]]ㆍ[[곽거병]]ㆍ[[만력제]]ㆍ[[주원장]]이나 [[항우]] 등 유명인물의 묘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당했다가 후에 복원되었다. [[홍위병]]의 반달행위는 1969년을 끝으로 사그라들었기 때문에 [[만력제]]의 무덤처럼 대대적으로 발굴했다가 파괴될 여지는 적었지만, 당시 발굴에 동원될 만한 고고학 전문가들이 "지식반동분자"로 몰려 대부분 수용소에서 '교육' 중이었던 데다가, 이런 인력을 양성할 만한 대학은 문을 닫은 중이었다. 그렇다고 비전문가들이 발굴하는 것은 홍위병이 저지른 반달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결과적으로 병석에서 거의 식물인간 상태였던 [[마오쩌둥]]을 대신해 국정을 총괄하던 총리 저우언라이가 미래를 위해 제대로 판단하였다.] 무리하게 발굴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의 이런 태도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기에 한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경주시]] [[대릉원]]에 많은 미발굴 고분이 있지만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이후로는 대규모 발굴조사는 하지 않고 있다. 고고학의 태동기였던 [[일제강점기]]에 졸속으로 발굴한 곳들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이 본격적으로 발굴한 대릉원 고분은 [[천마총]]과 [[황남대총]] 정도인데, 여기서 이미 많은 데이터를 얻었으니 남아있는 많은 고분들은 후세에 더 많은 데이터를 얻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남겨두었다. 예를 들어 최대 규모의 신라 고분 [[봉황대]]는 무덤 위에 얽힌 나무 때문에 지금으로선 원형훼손 없이 조사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한국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1990년대 초반 다카마쓰 고분 발굴사업에서 내시경으로만 구조를 확인하고 그 이상 발굴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발굴을 중단했다. 우리나라에도 계획 없이 무분별한 발굴로 고고학계의 흑역사가 된 [[무령왕릉]] 발굴 사태가 있다.] 우리가 흔히 진시황릉 하면 떠올리는 병마용갱은 '''진시황릉 주변에 있는 구덩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진시황의 무덤은 문서 맨 위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언덕이며,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도 않았다.''' 병마용갱은, 무덤을 만든 다음 무덤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병마용을 넣은 후 다시 묻은 것. 현재 1호ㆍ2호ㆍ3호갱은 관람할 수 있도록 해 놓았고, 산산조각난 병마용을 복원하는 작업도 볼 수 있다. 1~3호 병마용갱의 병마용들을 복원하는 데만 수십 년 이상이 소요될 듯한데, 더 어마어마한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거나 확인된 지 얼마 안 된 병마용갱이 아직 많다는 사실이다. [[신서유기]] 시즌 1에서 병마용을 방문한 바 있다. 덕분에 병마용을 간략하게 훑어볼 수 있는 영상이 생겼다.[[http://tv.naver.com/v/53365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