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수런 (문단 편집) === 1931년 하미 반란 === 그러다가 1931년 2월, [[하미시|하미(쿠물)]]의 샤오푸 마을 징세관 겸 경찰서장 장씨가 위구르인 미녀를 강제로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고 들자 분노한 위구르인들이 중국인 경찰들을 살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100가구 상당의 한족들을 학살하였다. 진수런은 여단장 웅발유를 파견하여 하미를 도로 장악했으나 보복으로 닥치는대로 위구르인들을 학살하여 민심을 폭발시켰다. 한족들에게 항복해봐야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위구르족들은 너도나도 무기를 들고 저항하기 시작했고 [[막수드 칸]]의 대신이었던 [[호자 니야즈]]와 [[율바르스 칸]]이 가세함에 따라 소요는 곧 1931년 하미에서 위구르인들이 대규모로 봉기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여기에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회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가세하였다. [[호자 니야즈]]와 [[율바르스 칸]]이 [[하미 칸국]]의 복고를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은 이들이 [[감숙성]] 군벌 [[마중잉]]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조직적인 반란으로 커졌다. 감숙성의 야심가이며 국민혁명군 36사단장이었던 마중잉은 10대의 나이에도 엄청난 위세를 떨치는 야심가였고 율바르스 칸의 요청으로 신강성을 정복하여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신강으로 진출하였다. 국민정부는 위구르족 반란을 진압하기는커녕 이들에게 수정공서주임 자리를 내줌으로 오히려 이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1933년 시점에는 [[우루무치]]까지 위험해졌다. 진수런은 사태를 만회하기 위해 난징 국민정부에 비서인 [[노효조]]를 파견하여 상교참모 [[성스차이]]를 신강성의 육군군관학교 교장 겸 독판공서 참모주임으로 임명하여 신강성의 군관 훈련 시스템을 개혁하고 [[마중잉]]을 상대하기 위한 전법을 연구하게 하였다. 신강성의 연고가 없던 성스차이는 진수런의 신임 하에 순식간에 신강성 최고의 군사 실력자로 거듭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