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수(역사가) (문단 편집) === 촉까? === [[제갈첨]]과 사이가 나빴다는 설도 있었는데 이런 설들이 생긴 이유는 진수가 기록한 기록에서 제갈량과 제갈첨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진수가 속했던 시대 상황을 전혀 생각치 않은 근시안적인 평가이며, 진수가 《삼국지》를 썼을때 그가 진나라의 관리였고 위를 정통으로 썼는데도 촉을 그 정도로 써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촉까라는 말은 절대 못한다. 애초에 [[촉빠]]니 [[위빠]]니 하는 한참 후대의 개념을 진수에게 적용하는 게 언어도단이다. [[공자]]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는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지지하는지 논쟁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각국 군주의 호칭들을 보아도 위나라는 [[조조]]를 무제(武帝)로,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明帝)로 호칭했고 촉한은 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불렀다. 그러나 오나라는 얄짤없이 모두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이렇게 위나라가 정통임을 인정하지만 촉나라는 오나라보다 더 권위가 높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조조가 위왕에 오를 때는 깔끔하게 위왕이 되었다고만 썼지만,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될 때는 촉나라의 신하들과 유비 본인이 [[한나라#s-1.2]]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자세히 기록하며 좀 더 비중 있게 묘사했다. 또 [[양희]]의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241년)[* <촉서> 권 15·<양희전>, 즉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에 전문을 수록하였다.]을 끼워넣고 자기가 보충한다던지 [[극정]]의 평을 싣는다던지 해서, 촉한의 사람들이 내부에서 촉한의 인물들을 바라봤던 시선을 전하고 촉한 인물등 중 열전을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에 관한 얘기도 실었다. 즉 촉까는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에 촉나라 사람이니... >可謂識治之良才,管、蕭之亞匹矣。然連年動衆,未能成功,蓋應變將略,非其所長歟!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할 만하니, [[관이오|관중]]과 [[소하]]에 버금간다. 그러나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 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나 보구나!) > - 《삼국지》권 35·<촉서>·<제갈량전>[[https://zh.wikisource.org/wiki/%E4%B8%89%E5%9C%8B%E5%BF%97/%E5%8D%B735|출처]] 진수가 《[[제갈량집]]》을 지은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그가 제갈량까라는 것도 어폐가 있다. 사실 《삼국지》ㆍ<제갈량전>에서 열전 마지막의 평가 부분에 "임기응변은 제갈량의 장기가 아니었다." 라고 하는 부분도 "우리 승상님이 임기응변만 잘했으면 다 이기는 건데..." 하는 식으로 볼 여지가 있다.[* 후에 [[원준]]도 비슷한 논리를 펼치지만 조선시대 간서치로 유명한 [[이덕무]]가 '제갈량이 임기응변이 장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진수의 여론(餘論)을 모은 것뿐이지 제갈량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라고 진수와 원준을 비판하였다.] 대신 제갈첨의 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나면 제갈첨의 것이라고 했다'''라는 말을 해서 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배송지가 단 주에 따르면 진수가 제갈첨에게 치욕을 받아서 제갈첨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의혹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진 영화(永和) 3년(347년), 촉의 사관인 [[상거]][* 《[[화양국지]]》의 저자다.]는 촉 장로가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진수가 일찍이 제갈첨의 관원이 되었다가 제갈첨에게 모욕당했는데, 이 일 때문에 죄악의 원인을 황호에게 돌리며 '제갈첨이 능히 바로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 >손성의 『이동기』 또한 진수는 [[초주]]의 제자였는데, 초주는 도참설[* 圖讖說 :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의 신봉자로 진수 역시 도참설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초주 문서에도 언급되지만, 진수의 기록을 약간 과장하자면 초주는 "[[유선(삼국지)|황제]]의 이름이 재수가 없어 나라가 망국의 길로 가겠으니 쓸데없이 저항은 삼갑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고 유선의 사위라는 배경 때문이건 뭐건 간에 17세에 기도위를 달고, 36세에 위장군 평상서사에 도호까지 겸한 인물이다. 40세 이전에 군부와 조정의 요직이란 요직은 다 해먹었다. 그런 인물한테 '시,서,화를 잘했다', '무슨 일이건 좋은 일이면 백성들이 갈후가 한 일이라고 하여 명성이 실제를 넘어섰다' 정도밖에 기록이 없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차라리 무능해서 뭔 실책이 많았다고라도 썼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