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수(역사가) (문단 편집) == 생애 == [[자(이름)|자]]는 승조(承祚)이고 파서군(巴西郡) 안한현(安漢縣) 출신으로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같은 군의 [[초주]]를 스승으로 섬겼다. 초주는 진수에게 학문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니 도중에 실패를 겪어도 불행이 아니므로 언행에 신중히 해야 한다고 했다. [[촉한|촉나라]]에서 벼슬하면서 관각영사(觀閣令史)가 되었다.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잡자 그 위세와 권력에 대신들이 뜻을 굽히고 따랐으나, 진수 홀로 이에 굴복하지 않다가 자주 좌천되거나 파면되었다.[* 《진서》권 82·열전 제 52<진수전> : 宦人黃皓專弄威權,大臣皆曲意附之,壽獨不為之屈,由是屢被譴黜。[[https://zh.wikisource.org/zh-hant/%E6%99%89%E6%9B%B8/%E5%8D%B7082|출처]]] 진수는 그 당시 여러모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 상중에 병이 나서 하녀를 시켜 환약(丸藥)을 만들게 했는데, 마침 찾아온 손님이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부모의 상중에 병이 나거나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서 사람들에게 불효자라고 욕을 먹었다. 촉이 [[위(삼국시대)|위나라]]에게 멸망한 뒤 [[서진]]의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불효자로 낙인이 찍힌 그는 여러해 동안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다행히 진수의 재주를 아낀 [[장화(삼국지)|장화]]의 천거(薦擧)로 진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같이 촉나라에서 벼슬을 지냈던 [[이양]]과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져 서로 악담, 욕설을 주고 받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진수가 진의 관직에 오른 뒤에 이양도 진의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했지만, 옛 친구인 진수가 그 취직 활동을 방해했다고 한다. 촉한이 멸망한 후 촉한 출신 신하들인 [[수량#s-2]], [[이밀(촉한)|이밀]], 진수, 이양, [[두열]], [[왕숭]]과 함께 경도 낙양에 같이 들어갔다. 나중에 이들간의 사이는 소원해졌지만 왕숭만은 성정이 너그럽고 후하며 온화하고 순해 나머지 5명과도 여전히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벼슬길에 오르고 제갈량의 글들을 모아 《[[제갈량집]](諸葛亮集)》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역사서 저술에 힘썼다. 또한 삼국시대 때의 여러 역사 기록들을 모아서 《[[정사 삼국지|삼국지]]》를 썼다. 진수는 위나라로부터 [[선양#s-1]]을 받은 진의 신하였기에 삼국지를 쓸 때 위를 정통으로 썼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촉의 관리이기도 했기 때문에 촉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으며, [[오(삼국시대)|오나라]]가 망하자 오나라 출신 학자들과 공동으로 오의 역사 기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의 《삼국지》는 당대에 이미 뛰어난 글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내용이 간략한 점이 있었으며, 결국 약 한 세기가 지난 뒤에 [[송(육조)|유송]](劉宋)의 문제 [[유의륭]]은 대장추(大長秋) [[배송지]]를 시켜 주석을 달게 했고, 배송지의 주석은 이후 《[[삼국지연의]]》 창작에 큰 밑거름이 된다. [[하후담]]도 당시 《위서(魏書)》를 지었는데 진수가 쓴 《삼국지》와 비교해 보고 곧 자신의 책을 없애버리고 더 이상 위나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그만뒀다고 한다. 장화는 《삼국지》를 매우 훌륭하다고 여기며 "《[[진서]]》를 편찬하는 일도 맡겨야겠소."라고 진수에게 말했다.[* 《진서》권 82·열전 제 52<진수전> : 張華深善之,謂壽曰:"當以《晉書》相付耳。"[[https://zh.wikisource.org/zh-hant/%E6%99%89%E6%9B%B8/%E5%8D%B7082|출처]]] [[장화(삼국지)|장화]]가 진수를 중서랑(中書郞)으로 천거하려고 했지만, [[순욱(서진)|순욱]]은 장화의 정적이었고 진수를 미워하여 이부(吏部)에다가 그를 모함하는 말을 하여 외지인 장광군(長廣郡) 태수(太守)로 자리를 옮기게 했는데, 진수는 모친이 연로함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두예]]가 나서 이를 무마하고 황제에게 다시 천거하니, 상서(尙書)의 상주(上奏)에 관련된 일을 돕는 것이 좋겠다 여겼다. 이리하여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이 걱정되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모친이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낙양]]에 안장했는데, 이는 고인을 고향 땅에 장사지내는 풍습에 어긋나는 일이 었기 때문에 또 다시 불효자라고 욕을 먹고는 파면당했다. 몇 년 후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기용되었지만 사양했고, 원강(元康) 7년(297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상서랑(尙書郞) 겸 양주(梁州) 대중정(大中正) 범군(范頵) 등의 신하들은 황제에게 상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한무제]]가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위독하니 사람을 보내 그의 글들을 모두 거둬야겠다.' 사자(使者)가 그가 남긴 글들을 거두어보니, 내용 중에 봉선[* 封禪 : 고대 중국에서 군주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어 즉위를 고하던 의식.]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한무제가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저희가 보건대, 죽은 치사시어사 진수가 쓴 《삼국지》는 내용 중에 훈계하는 말들이 많고, 옛 일의 잘잘못을 명확히 가렸으니 사회의 교화에 유익할 것입니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사마상여에 미치지 못하나 정직하고 왜곡 없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니, 이를 모아 기록되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황제는 하남윤(河南尹), 낙양현(洛陽縣) 현령에게 명령를 내려, 진수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그의 책을 베끼게 했다.[* 《진서》권 82·열전 제 52<진수전> : "昔漢武帝詔曰:'司馬相如病甚,可遣悉取其書。' 使者得其遺書,言封禪事,天子異焉。臣等案:故治書侍御史陳壽作《三國志》,辭多勸誡,明乎得失,有益風化,雖文豔不若相如,而質直過之,願垂採錄。" 於是詔下河南尹、洛陽令,就家寫其書。[[https://zh.wikisource.org/zh-hant/%E6%99%89%E6%9B%B8/%E5%8D%B7082|출처]]] 하마터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 했던 진수의 《삼국지》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니, 굴곡 많은 인생을 마친 끝에 참으로 옛 스승의 말대로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