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성여왕 (문단 편집) === 재위 전반기의 국정 운영 === 《[[삼국유사]]》에는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진성여왕의 [[유모]] 부호부인과 [[부호부인]]의 남편 [[김위홍|위홍]] 등이 실권을 잡고, 정치가 어지러워졌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김위홍이라는 사람의 [[신분]]은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숙부이므로 신라의 [[왕족]]이다. 그런데 진성여왕은 유모 부호부인의 남편 겸 자신의 숙부가 되는 위홍과 [[불륜]] 관계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임금]]이 평소 [[각간]] 위홍과 [[간통]]했는데 그가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위홍 사후 임금이 은밀히 [[미소년]]과 미장부 2~3명을 [[경주 월성|궁]]에 끌어들이니 음탕하고 문란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정치를 맡겼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 《[[삼국유사]]》 <왕력>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위홍 대각간(大角干, 한편 <진성여왕조> -거타지-에서는 잡간(匝干)으로 나온다)은 왕의 남편으로 사후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위홍은 아내 부호부인이 [[사망]]한 후에 조카 진성여왕과 재혼한 것으로 보았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9%80%EC%9C%84%ED%99%8D&ridx=0&tot=1|출처]] [[이배용]] 교수는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이전까지는 여왕과 정식 혼인관계가 아니었다가 여왕이 즉위한 후 정식 남편이 되었다고 보았다. 전기웅 교수는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후부터 그녀와 공공연한 관계를 드러냈으나 정식 혼인은 아니라고 보았으며, 김창겸 교수는 위홍이 본래 진성여왕의 사통하는 정부였다가 여왕 즉위 뒤에 남편이 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권영오 교수는 진성여왕 근처 시기를 다룬 《삼국유사》 <왕력>의 기록들이 전반적으로 부정확하다는 이유로 김위홍이 여왕의 남편이라는 기록의 신뢰도 역시 낮다고 보았다. 다만 권 교수는 《삼국사기》의 김위홍과 여왕이 '통'(通)했다고 한 기록을 서로 [[섹스|검열삭제]]하는 관계였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부정했다. 이러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모아놓은 글로는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10073&cid=49243&categoryId=49243|문화원형백과 위홍 문서]]가 참고된다.] 그러나 왕이 [[후궁]]을 거느리는 것이 당대에도 후대에도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년과 미장부 두 셋을 끌어들였다는 사실만으로 마냥 [[암군]]이라고 칭하기는 어려운 편이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권력을 잡게 하여 왕경 [[서라벌]]의 정치를 어지럽게 한 것이다. 진성여왕 3년(서기 889년)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물을 바치지 않아 재정이 궁핍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百座講經)[* 인왕백고좌회, 약칭 '백고좌회'를 의미한다.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의 번영과 안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호국불교 행사다. 주로 [[신라]] 시대에 행해졌으며, 마지막 기록은 [[고려]] [[원종(고려)|원종]]이 [[강화도]]에서 행한 것이다.]을 한 것 외에는 민심 수습을 위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효녀 지은]] 설화>가 진성여왕 시대의 일인데, 당시 가난을 이기지 못해 구걸하고 다니거나 부잣집의 종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구]]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현춘]]이라는 인물은 895년 배 100여 척, 병력 2,5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규슈]] 지역을 약탈하다 사로잡히기도 했다.[* 현춘은 자신을 보낸 이가 신라 왕이라 주장했는데, 이때의 왕이 진성여왕이다. 현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진성여왕이 [[대마도]]를 약탈해오라 지시했단 말이 된다. 물론 어떤 지방 호족이 진성여왕의 명령이라 사칭해서 현춘을 대마도로 가게 했을 가능성이나 현춘 스스로가 블러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일각에선 재정난에 시달리던 신라 조정이 반독립적인 신라구 세력을 사주해서 대마도의 물자로 재정난에서 벗어나려 한 게 아닌가라는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889년 [[원종·애노의 난]]과 더불어 [[적고적]]이 창궐하고, 896년 적고적이 서라벌 근처까지 쳐들어 와서 본진이 불타려는 판국에 작은 섬의 약탈 물자로 뭔가를 시도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 외의 업적으로는 888년 군주가 각간 [[위홍]]에게 명해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게 하니, 그 책 이름을 《[[삼대목]]》이라 하였다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연회장에서 불리는 향가의 가사가 조금씩 달라 국가 공인 '[[노래방]] 가사집'을 만들려 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1/2009121101173.html|#]] 다만 아버지 경문왕이 [[화랑]] 출신이고, [[향가]]는 화랑도나 [[승려]]가 주로 지었다거나, <[[찬기파랑가]]>나 <[[모죽지랑가]]>처럼 여러 화랑들을 칭송하는 향가들이 존재하는 점을 감안하면 《삼대목》 편찬도 단순히 문화적 동기가 아니라 '''경문왕가 신성화 작업=왕권 강화책의 일환'''이라는 해석도 있다. 즉 훗날 조선에서 《[[용비어천가]]》를 지은 것과 같은 목적으로, 단순한 노래 수집 여흥이 아니라 흔들리는 하대 왕권을 다잡아보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 단서로 숙부 김위홍과 함께 승려 [[대구화상]]에게 향가를 수집하도록 했는데, 대구화상은 《[[삼국유사]]》에서 [[요원]]랑, [[계원]]랑, [[숙종]]랑 등 화랑들에게 경문왕을 칭송하는 노래를 만들게 한 기록이 있다. 물론 《삼대목》에는 적어도 대구화상이 관여한 이 노래들은 분명히 들어갔을 것이다. 참고로 학습 만화 《신라 왕조 1000년》에선 진성여왕이 [[제4의 벽|"내 유일한 업적인 《삼대목》이 전하지 않다니."]]라고 외치며 대성통곡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진성여왕의 재위 중 그녀가 제대로 뭘 했다는 기록이 설화를 제외하면 이거 하나뿐이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